내 심정은 우울했다. 나 역시 김영삼 총재와는 정치부 기자 시절이었던 3대 국회 후반부터 알고 지냈으며 벌써 20여 년간 인간적으로 가깝게 지내온 사이였기에 그의 제명은 한없이 우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젠 마지막이구나!’
공화당은 이제 막다른 골목까지 몰렸다는 침통한 생각으로 나는 국회 의사당을 힘없이 걸어 나왔다.
사건이 사건인지라 이에 반발한 야당은 신민당 의원 60명 전원과 통일당 의원 3명이 국회의원 사퇴서를 내기에 이르렀다.
이젠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해결 방법이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당내 강경파에서는 야당 의원들의 사표를 선별 수리하자는 주장까지 나와 정국은 더욱 꼬여가기만 했다. 나는 그런 보도를 보고는 기자들 앞에서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사태를 이성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야당 의원들의 사표를 선별 수리하겠다니 말이 되는가?”
나의 이 말은 당시 《중앙일보》에 보도돼 또다시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젠 끝이었다. 9월 4일 대구의 계명대, 경북대, 영남대생들의 유신 철폐 데모에 이어 10월 16일에는 부산대생 5천여 명이 유신 철폐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여 바야흐로 부마사태로까지 이어지기 시작했다.
나라가 이처럼 심각한 지경에 이르자, 나는 국회의원인 것이 부끄럽기까지 했다. 그리고 고뇌하면서 생각했다.
‘어쩌면 다시 4·19와 같은 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그때도 대구에서 데모가 시작되지 않았던가. 그렇게 되면 나라는 어떻게 될까? 만일 4·19와 같은 사태가 다시 발생한다면……, 그때는 박 대통령이 암살당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살할지도 모른다. 이승만 박사야 스스로 물러났지만, 박 대통령은 군인 출신이기 때문에 이 박사와는 다르지 않을까. 혼자서라도 끝까지 청와대를 지키다가 자결의 길을 택할지도 모른다. 만일 박 대통령이 돌아가신다면 어떻게 될까? 만일 과격한 차지철이 대권(大權)에 욕심이 있다면 엉뚱한 짓을 저지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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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희 대통령이 10·26 서거 전 공화당 훈련원을 방문했다 (박대통령 옆으로 오른쪽 두 번째가 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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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일이었다. 그만큼 당시 상황은 극도로 불안했다. 그렇다고 이런 생각을 아무에게도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다만 평소 서로 믿는 정치 선배인 백남억 전 당의장에게 터놓고 걱정한 일이 있었다.
“백 의장님! 큰일입니다. 이렇게 나가다가는 앞으로 걷잡을 수 없는 파국이 올 텐데, 장차 이 나라를 어떻게 해야 살릴 수 있겠습니까? 불행한 사태가 생길 때를 대비해 미리 대책을 강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게 말이오. 나라의 앞날이 정말 걱정입니다…….”
백남억 의장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내 말이 워낙 심각하고 두려운 내용인지라 백남억 의장은 오히려 그런 이야기를 서로가 안 했던 걸로 하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이렇듯 나나 백남억 의장, 그리고 많은 지식인들이 나라의 상황을 우려하고 있는 사이에 결국 부사사태가 터지고 말았다.
10월 17일은 공교롭게도 유신 체제가 공포된 날이었다. 그날 저녁 청와대 영빈관 2층에서는 유신 선포를 기념하기 위해 공화당, 유정회 의원들과 각료들이 전원 참석한 가운데 만찬이 벌어졌다.
나 역시 그 자리에 참석했지만 마음은 천근만근이었다. 부산에서는 유신 철폐를 외치며 데모가 벌어지고 있는 시간에 유신 선포 기념파티라니, 그래선지 그날따라 대통령의 얼굴도 밝지는 않았다. 구자춘(具滋春) 내무장관이 들락날락하며 은밀히 대통령의 귀에 대고 무언가 자주 보고하는 모습도 보였다.
인기 가수들과 국회의원 몇 사람도 단상에 나와 노래를 불렀지만 그들도 분위기를 감지해서인지 어딘가 어색하기만 했다.
결국 유신 선포 기념 만찬이 끝난 지 불과 두어 시간도 안 된 18일 0시를 기해 부산에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한편, 각 대학에는 휴교 조치가 내려졌다. 1964년 한·일 회담과 관련된 6·3사태 때 서울 일원에 내려졌던 비상계엄에 이어 15년 만에 발동된 계엄령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