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계엄령은 국민의 민주화 열기를 막기는커녕 더욱 불을 붙이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18일 저녁에는 부산 시민까지 합세했고, 급기야 마산까지 번졌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학생 데모에 시민들까지 합세했으니 이제 사태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나는 10월 27일 새벽, 전화로 박준규 당의장으로부터 ‘대통령 유고(有故)’ 소식을 듣고야 말았다.
순간 문득 떠오른 게 있었다. 지난번 김재규 부장이 나에게 “차지철 때문에 나라가 걱정”이라고 한 말이었다. 사건의 전모를 정확히 모르면서도 대통령 유고가 김재규 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의 갈등과 관계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한때는 비상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대책까지 생각해 본 나였건만, 막상 현실로 눈앞에 닥쳐오니 걱정만 앞섰다.
돌이켜보면 박 대통령은 경제적으로는 훌륭한 업적을 남겼지만,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에 역행했던 양면성을 지녔던 게 사실이다. 만일 박대통령이 3선 개헌을 하지 않은 채 중임의 8년 임기를 마치고 물러났거나 적어도 3선만 하고 유신을 하지 않았던들 이러한 비극적인 종말은 초래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평화적인 정권 교체의 선례를 남겨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위대한 지도자로 추앙됐을 것이다.
이와 같이 공화당이 경제 치적에도 불구하고 결국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비극적인 몰랐을 맞게 된 원인은 무리한 3선 개헌과 1972년 10월 유신 이후 장기 집권에 따르는 권력 심층부의 타락과 부패에 있었다. 그리고 근인(近因)으로는 권력층 내부의 경직성과 과잉 충성에서 빚어진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1978년 12월 제10대 총선에서의 공화당 1.1% 패배와 광범위한 민심 이반, 그리고 부마사태가 결정적인 것이다.
특히 시해 사건의 직접적인 동기는 박정희 대통령, 김재규 부장, 차지철 실장 3자간의 미묘한 갈등 관계에 있다고 생각된다. 정권 말기에 박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차지철 경호 실장 중 김재규 부장은 비교적 합리적이고 온건한 편이었으며 차지철 신장은 강경 일변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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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를 알리는 동아일보의 10월 27일 자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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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제는 박 대통령이 모든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 김 부장보다 차지철 실장의 의견에 귀를 더 기울였으며 심지어 차지철 실장 앞에서 김재규 부장에게 면박을 주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5·16혁명 당시 차 실장은 육군 대위였으며 김재규 부장은 장군이었다. 그래서 김재규 부장은 이런 일이 반복될수록 심한 불쾌감과 모멸감을 느꼈을 것이며 1979년 10·26사건 직전에 나를 만났을 때 “차지철이 때문에 골치가 아파 죽겠다”고 푸념한 것도 이러한 김 부장의 심리가 잘 반영된 것이라고 판단된다. 이에 김재규 부장이 차지철 실장을 없애야겠다고 생각하다 보니 결국 박 대통령까지 시해하게 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한편 당시 김재규 부장의 박 대통령 시해 사건에는 미국이 관련되어 있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그것은 박 대통령이 미국 몰래 핵개발을 시도함으로써 미국과 긴장 관계가 높아진 데 그 원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1970년대 들어 미국 정부가 아시아에서 미국의 열할 감소를 의미하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고 1971년 3월 주한미군 제7사단 병력 약 2명이 한국에서 철수하여 미군이 크게 줄어들자, 박 대통령은 자주 국방을 내세우며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에 나섰다.
이어 1975년 4월 베트남 내전이 공산화로 끝나자 박 대통령은 ‘번개 사업’으로 명명된 핵 및 미사일 개발을 본격화했다. 이렇게 되자 1976년 5월 당시 포드 행정부의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한국이 핵무기 개발을 고집하면 미국은 안보 경제문제를 포함해 한국과의 모든 관계를 재검토할 것”이라고 정면으로 경고했다. 바로 그 럼즈펠드가 지금 부시 행정부의 국방장관인 것이다.
프랑스와 비밀리에 핵 재처리 시설 및 기술 공급 계약을 체결, 핵개발이 초읽기에 들어가자 한·미간에 긴장감은 더욱 높아졌으며, 이것이 박 대통령 시해 사건에 미국이 관련되어 있다는 설까지 나돌게 한 근거가 되기도 했다.
11월 3일 박 대통령의 국장을 치른 공화당은 12일에 김종필 씨를 새로운 총재로 선출했다. 사실 당내 일각에 반대 세력도 있었으며 나 또한 김종필 씨에게 다소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었으나 박 대통령이나 또는 김종필 씨에게 다소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었으나 박 대통령이 없는 이상 일단 그를 중심으로 일치단결하는 게 당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유신헌법 개정을 논의하기 위해 김영삼 신민당 총재와 만나는 등 개헌논의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아울러 국회에서도 헌법특위를 구성했다. 여·야 동수로 공화당 7명, 유정회 7명, 신민당 13명, 통일당 1명으로 구성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