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순조로운 듯 보였던 정치 일정에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즉 ‘12·12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다음 날인 13일 국방부는 박 대통령의 시해와 완련해 군 수사기관이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했으며, 새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중앙종보부장 서리인 이희성(李熺性) 육군대장을 임명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전면에 등장했다.
이러한 권력 변동에도 국민들의 민주화 욕구는 결코 수그러들지 않았다.
1980년 2월 29일 정치 활동 규제에 묶여 있던 김대중 씨가 복권되면서 바야흐로 3김 시대가 열렸다. 3심씨는 직선제 개헌에 의한 뜨거운 대구너 경쟁에 들어갔다.
사회 전반에 봄이 넘쳐흐르고 있을 때 신군부는 서서히 자신들의 시나리오를 드러냈다. 4월 14일 최규하 대통령은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임명했다. 이를 두고 외국 언론에서는 “전두환 중장이 현역 군인으로서 대통령의 중요 정책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교토통신), “뒤에 있던 전 중장이 표면에 나섰다”(《요미우리신문》)는 등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3김 씨는 이를 주의 깊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영삼 총재는 “민주화 일정은 예정대로 진행될 것”이라고 했고 김종필 총재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이 문제”라며 대수롭지 않다는 입장이었다. 김대중 씨는 “반민주 세력에게 구실을 줘서는 안 된다”고 경계했지만 우려 표명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나 나는 예감이 이상해 김종필 총재의 특보였던 장영순(張榮淳) 의원에게 “육사 11기생들을 주목하라”고 충고를 하기도 했다. 신군부는 권력 장악을 위해 치밀하게 움직이고, 3김씨는 각각의 속셈대로 대권 경쟁에 빠져 있는 동안 시간은 흘러갔다. 5월 들어 계엄 해제와 과도기 단축 등을 요구하는 학생 시위가 학교 울타리를 넘어 가두시위로 발전했고 신군부는 이를 기다렸다는 듯 칼을 빼 들었다.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마침내 비상계엄 확대 조치가 발표됐다. 이어서 계엄포고 제10호에 의해 전·현직 국가원수 비방 금지, 정치 활동 중단, 대학 휴교 조치 등이 내려졌다. 아울러 대권 경쟁을 벌이던 3김씨에 대해서도 김종필 씨는 부정 축재 혐의로 검거 되고, 김대중 씨는 내란 음모 혐의로 구속됐으며, 김영삼 총재는 연금 상태에 들어갔다. 뿐만 아니라 정치 활동이 금지됨으로 헌정이 중단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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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 집권의 사전 조치로 김대중, 김종필을 젼격 연행한 5.17에 대한 경향신문의 호외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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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군부는 그 같은 조치를 독재 체제에서 민주화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현상에서 나타난 혼란으로 규정했지만, 그건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정치 활동을 금지시킨 군부는 이미 국민적 합의로 굳어져 있던 직선제를 선거인단에 의한 대통령 간선제로 바꾸었다. 1980년 서울의 봄은 꽃도 피워보지 못한 채 모진 찬 서리를 맞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8월 16일 수순대로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한 후 27일엔 전두환 국보위위원장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리고 전 대통령은 9월 1일에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980년 9월 20일, ‘5·17 조치’ 이후 처음에는 제105회 정기국회가 열렸다. 나는 실로 오랜만에 여의도 국회의사당으로 향했다. 역시 정문에는 탱크가 위압적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국회 정문을 들어서자 유난히도 파란 잔디가 내 눈에 들어왔다. 본래부터 있던 것이었지만, 그날따라 유난히 푸르게 보인 건 몇 달 만의 출입이기도 했지만 당시 탱크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나는 일부러 차에서 내려 내 손으로 잔디를 쓰다듬어 보기까지 했다. 허리를 굽히는 순간 뭉클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토록 대지 위의 잔디는 자연의 순리대로 자라건만,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왜 순리대로 자라지 못하는 것일까? 이 잔디들은 국회에 탱크가 서 있고, 국회의원들이 출입하지 못하는 현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국회의사당의 모습은 그대로였다. 10·26 이후 거의 1년간 세상은 질곡과 수난으로 점철돼 있었지만, 의사당은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 말 없이 묵직한 모습 그대로였다.
본회의장도 달라진 건 없었다. 다만 부정 축재니 뭐니 해서 구속된 의원들이 적지 않아 텅 빈 자리가 많이 눈에 띌 뿐이었다. 가슴이 아팠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정치력을 상실한 국회는 이후 이틀 뒤인 22일 남덕우 국무총리와 이한기(李漢基) 감사원장의 임명동의안을 가격한 후, 휴회 결의를 하고 산회하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