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순 전혀 예측하지 못한 단어가 튀어나온 때문인지 의사당 안에는 갑자기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여당은 물론 야당도, 그리고 국민당 의원들조차 놀라는 얼굴이었다. 나는 개의치 않고 이번에는 국회의원 선거제도에 관해서 계속 언급했다.
“……역사적으로 모든 선거는 그 나름대로 의미를 갖고 있지만, 특히 이번 3·25 총선이야말로 한 시대를 새롭게 구획하는 우리나라 헌정(憲政) 사상 가장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3·25 총선은 과거 유례없는 타락 선거요, 행정 선거였습니다. 또한 비례대표제 역시 문제입니다. 제1당이 무조건 전국구 의석의 3분의 2를 차지한다는 것은 정치도의적으로나 이 제도가 지닌 본래의 취지에도 크게 어긋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 발전의 요체는 공명정대한 선거제도와 이의 공정한 관리, 그리고 깨끗한 선거 풍토의 보장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인은 앞으로 국회의원 선거구의 지역 범위를 현 선거구의 2배 또는 3배로 늘리든가, 또는 도(道) 단위의 대선거구제로 확대해 철두철미하게 공영제를 실시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타락 선거를 막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본인은 국회 내에 ‘선거제도개선특별위원회’를 설치해, 여야 공동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정식으로 제의하는 바입니다.”
나는 정치쇄신법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보복 풍토가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참다운 국민적 화합과 국력의 결집을 바라는 충정에서입니다……. 제5공화국이 출범하고 국회가 구성된 마당에, 대통령은 현행 정치쇄신법에 묶여 있는 모든 인사들에게 하루 속히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을 촉구하는 바입니다.”
의석은 상당히 술렁거렸다. 새 정부가 출범한지 몇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체제 유지와 관련된 대통령 직선제, 국회의원 선거제도, 정치쇄신법 문제를 거론하니 여야 모두 충격을 받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난 아랑곳하지 않은 채 의석과 국무위원석, 그리고 방청석, 기자석까지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그 당시로는 성역(聖域)이라고 할 수 있는 ‘군의 정치적 중립; 문제까지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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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회 대표연설에서 직선제 개헌과 군의 정치적 중립을 요구하고 있다 (뒤에는 채문식 국회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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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 문제는 우리 조국의 생존권과 직결되는 것으로, 우리가 잠시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국정의 최우선입니다……. 그러나 군의 사기 진작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군은 본연의 임무인 국토방위에만 전념하고, 정치는 정치인에게 맡겨야 합니다…….”
또한 나는 나 자신이 언론인 출신이었기에 정부의 언론 정책에도 비판을 가했다.
“언론은 사실을 보도하는 고유의 기능 이외에도 여론 형성을 유도하는 중요한 기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언론 편집권의 독립성을 되찾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실질적인 언론 규제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언론기본법은 자유 언론 창달을 위해 마땅히 철례돼야 할 것입니다.”
정부에 할 말을 다 한 나는 마지막으로 당부의 말을 했다.
“국민들에게 내일에 대한 꿈과 희망과 믿음을 줘야 합니다. 성현(聖賢)의 말씀 중에 ‘민무신불립(民無信不立)’이란 말을 기억합니다. 백성은 믿음이 없으면 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믿음은 사회 존립의 기초입니다. 때문에 이것을 잃으면 사회는 붕괴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앉아 있는 우리들이 정직하고 참된 사회를 만들어 자라나는 이 나라의 젊은이들에게 믿음과 희망을 주도록 합시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수위의 발언이었던 나의 대표연설은 그날 석간과 다음날 조간을 크게 장식했다. 그러나 제도권 정치의 굴레에서 벗어난 이러한 발언으로 인해, 이후 많은 유·무형의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당시만 해도 강압 정치의 시대였기에 바른 소리를 하는 국회의원이 드문 때였다. 따라서 나는 당국과 상당한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기에 당시 정치권에서는 이런 말이 나돌기도 했다.
“요즘 같은 분위기에서 제도권 정치에 도전하는 국회의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만섭 의원뿐이다.”
아울러 당국은 날 가장 까다로운 정치인으로 분류해 놓고 있었다고 후일 들은 바도 있다. 1982년으로 들어서자 제5공화국으로서는 치명적이라 할 엄청난 사건들이 잇달아 터져나왔다. ‘의령 경찰관 총기 난사 사건’과 ‘장영자(張玲子)·이철희(李哲熙) 사건’이 바로 그것이었다.
의령 총기 사건은 4월 26일 경남 의령경찰서 궁류지서의 우범곤(禹範坤) 순경이 술에 만취된 채 인근 5개 마을 주민들에게 닥치는 대로 총기를 난사해 56명을 사망케 하고, 36명에게 부상을 입힌 사건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