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복학 후 털보 응원단장으...

그 후 집에서 한동안 쉬며 생각을 정리한 나는 대학에 복학하기로 결심하고, 그 해 9월 서울행 열차에 올랐다. 그 사이 전쟁은 소강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7월에는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조인됐고, 정부는 이미 8월 15일 환도한 후였다.

공사에 입교한 관계로 남들보다 늦은 만큼 더욱 열심히, 그것도 고학으로 학비를 벌며 다녀야했으나 이미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다. 복학해보니 신촌 캠퍼스의 분위기는 전시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울 정도로 해이한 상태였다. 아니 내 눈이 변했을까? 거의 3년간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고된 훈련을 견디던 내가 변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 도대체 학생들이 정신이 있는 건가, 없는 건가. 보통 해이해진 게 아니군. 정말 큰 문제다.’

학생들의 걷는 모습은 물론, 옷차림에다 생활태도까지도 내 눈에는 엉망으로 보였다. 가뜩이나 휴전으로 사회 기강도 다소 해이해진 때라 더욱 그러했다. 게다가 입학동기생들은 졸업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난 초조하기도 했지만 학교에 정을 붙여야겠다는 생각에 수염을 텁수룩하게 기르곤 응원단장을 자청하여 학교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때부터 ‘연대 털보 응원단장’이란 별명이 내 뒤를 따라다녔다. 어느 정도 유명했는가 하면 미국에 갔다가 오랜만에 돌아온 백낙준 총장이 채플 시간(매주 전교생이 모여 예배 및 설교를 듣는 시간)에 내 수염 얘기를 할 정도였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내가 없는 동안 우리 연희 동산의 나무도 많이 자랐지만, 이만섭 군의 수염도 많이 자랐겠지.......”라고 말했을 때 나는 일어서서 손을 번쩍 흔들었고, 이에 학생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며 환호할 정도였다. 아무튼 이 연대 털보는 옳지 못한 건 보면 참지 못하는 특유의 성격을 복학 후부터 발휘하기 시작했다.

나는 등교 때면 학교 정문에 서서 자가용을 타고 오는 학생들을 모두 차에서 내려 걷도록 했다. 당시엔 교수들도 걸어서 학교에 들어오는데 정부 고관의 자제라고, 또 돈 많은 학생이라고 특권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이 내 지론이었다. 게다가 때가 어떤 때인가. 전쟁으로 나라가 피폐해 서민들로선 보릿고개를 넘기기 어려울 때인데 자가용 등교라니.......

▲ 연세대 축구선수들과 함께 한 털보 응원단장 시절 / 앞줄 오른쪽이 나다

뿐만 아니었다. 당시 학생들은 서대문에서 신촌역까지 운행하는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신촌역 앞에서 연세대, 이화여대생들에게 줄을 서도록 야단치기도 하고, 버스 안에서 어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으면 호통을 치기도 했다. 때문에 이대생들은 특히 연대 털보생인 나를 무서워했고, 김활란 총장이 백 총장에게 “이만섭 학생이 우리 여학생들에게 너무 하는 것 아닙니까” 하는 항의 편지까지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내 성향은 여전했다. 처음엔 보인상고 수학선생으로 있던 형님 덕에 하숙생활을 했지만, 신세지기 어려워 두어 달 뒤부터는 쭉 가정교사 생활을 했다. 아무튼 점심시간이면 여전히 도시락이 없어 학교 뒷산에 올라가 점심시간이 끝날 때까지 책을 읽거나 푸른 하늘을 보며 명상에 잠기기도 했고, 학비를 벌기 위해 신동운 선생의 소개로 영어학원의 강사로 출강하기도 했다.

그래도 성적만큼은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강의에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학교에 정을 붙이기 위해 결강만큼은 나 자신이 결코 허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응원단장을 하면서도 학과 성적은 항상 상위권을 맴돌았다. 당시 연세대에서는 각 과에서 한 명의 장학생을 선발해 등록금을 전액 면제해주었는데, 내 이름이 자주 장학생 후보 명단에 올라 교무처 직원들은 응원단장인 내가 시험 때 커닝을 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계속 후보에 오르자, 그 제서야 “저 응원단장은 공부도 열심히 하는 학생이구나” 하는 좋은 인상으로 다시 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당시 내게 많은 영향을 준 은사로는 백낙준 박사, 김윤경(국어학), 정석해(철학), 오화섭(영문학) 등이 있으며, 정치학 교수로는 당시 미국에서 처음으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서석순, 조효원 박사와 정외과 선배인 김명회 박사 등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