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국의 불쾌감은 그날 당장 나타났다. 그날 저녁 조일제, 조병규 의원과 시내 인사동 골목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는데, 갑자기 김종철 총재로부터 급한 일이라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문제가 생겼소. 당국에서 이만섭 부총재가 의장에 출마한 것은 현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용납할 수 없다며, 이번 국회 대표연설에 이 부총재를 내세우지 말라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소?”
김 총재는 은근히 내가 연설을 안 해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나는 기분이 상했다. 당국의 처사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열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 총재의 마음을 이해하기로 했다. 당국이 워낙 강하게 나오기도 했지만 김 총재 자신이 비록 한국화약에서 손을 뗐다고는 하나 창업주로서 사실상 회사를 운영하는 입장이라 당국의 압력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표연설이야 다음에도 할 수 있는 것인데 당을 위해서라면 양보하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번 연설은 안 해도 좋으니, 편안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내세워도 좋습니다.”
결국 116회 국회 대표연설은 윤석민(尹錫民)·이종성(李鍾聲) 부총재 중 이종성 부총재(전 충남방적 회장)가 해야 했다. 당시 정치가 이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제도권 정치, 힘의 정치로만 일관했던 것은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사람들의 기본 사고방식이 경직되고 비민주적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 땅에 민간 정치인에 의한 정치를 실현하는 게 시급한 과제라고 확신했다.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던 내가 군이 아닌 민간인에 의한 정치라는 의미로 사용한 용어가 바로 ‘문민정치文民政治’였다. 1984년 2월 29일 121회 임시국회에서는 다시 내가 대표연설을 하게 됐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문민정부라는 말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 이 나라에 참다운 도덕적 민주정치가 이룩되기 위해서는 첫째, 문민정치를 확립해야 합니다. 다시는 이 땅에 무력에 의한 정치적 악순환이 없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힘에 의한 정치는 결과적으로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국가적인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때 내가 사용한 문민정치란 단어는 그 후 신문 지상에서 민간인에 의한 정치라는 표현으로 자주 사용됐으며, 현재까지도 쓰이고 있다. 나는 문민정치라는 단어를 이후에도 계속 사용했다. 12대 국회에 들어와 국민당 총재로서 대표 연설에 나선 1985년 5월 21일의 125회 임시국회에서도 역시 그 말을 사용했다.
“군이 어떠한 경우에도 총칼의 힘으로 정치에 개입하려 한다면, 그 자체가 이미 나라를 지키는 사명을 저버리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군의 정치적 개임을 막는 것만이 이 사람이 오래전부터 제창한 문민정부를 진정 이룩할 수 있는 길입니다…….”
1984년 중반부터는 신당 창당 움직임이 꿈틀댔다. 5월 18일 광주 민주화운동 4주년과 김영삼 씨의 단식 1주기 날 민주화추진협의회(民主化推進協議會)가 결성되었다. 신당 탄생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민추협은 7월 들어서는 도별로 지부를 설치하는 등 꾸준히 조직을 확대했다. 11월 30일에는 정치 활동 피규제 대상으로 남아 있던 99명 중 김영삼, 김대중 씨를 빼고는 주요 야당 인사 84명이 해금됐다. 이는 민추협의 신당 결성 및 선거 참여에 촉매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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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4년 11월 30일 단행된 정채해금자 명단 기사 (경향신문 1984년 11월 30일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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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권 정치에 몸담고 있는 나는 민추협의 취지에 적극 공감했고, 민추협의 민주화 노력을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이들이 현실 정치 속에 들어와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함께 싸워나가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이미 11대 국회 초반부터 국민당 대표 연설에서 “정치 규제를 빨리 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추협을 모태로 한 신민당은 1985년 1월 18일, 선거를 20여 일 앞두고 발족했다. 그리고 2월 12일에는 제12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신민당의 바람은 거셌다. 대구 중·서구에서 국민당으로 출마한 나는 당초 1등을 자신했다. 그래서 신민당 유성환(兪成煥) 후보를 지원하기까지 했다. 유세장에서도 나는 유성환 후보를 한껏 추켜세우며 여당 후보를 찍지 말고 나와 유성환 후보 두 사람을 국회로 보내달라고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민당 돌풍은 내 예상보다 훨씬 강했다. 유성환 후보가 오히려 1등, 내가 2등이 된 것이다. 유성환 의원은 선거 과정에서 내가 보여준 호의를 두고두고 고마워했다.
최종 결과는 여당인 민정당이 148석이었고 신민당 67석, 한민당 35석, 그리고 우리 국민당은 20석을 얻었다. 그러나 민한당 의원의 경우 대부분 신민당으로 입당해 신민당은 강력한 제1야당이 됐고, 민한당은 원내 교섭단체조차 구성하지 못한 채 제3야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