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이 끝나자 국민당은 바로 전당대회를 열어 전열을 정비했다. 나는 당시 당내 최다선인 5선이었기에 총재 출마를 결심하고 있었다. 사실 12대 총선 내내 나는 병석에 누워 있던 김종철 총재를 대신해 총재 권한대행으로 그 어려운 선거를 치렀다. 때문에 의원들뿐만 아니라 당원들조차 당의 이미지 쇄신을 위해서도 내가 총재로 선출되기를 바라는 분위기였다.
따라서 나 자신도 특별한 경쟁자 없이 내가 총재로 선출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변수가 생겼다. 전당대회에 임박해 12대에 들어서 새로 영입한 경남 남해(南海) 출신의 최치환(崔致煥) 의원이 경선 출마를 선언한 것이다. 그 역시 나와 같은 5선 의원이었다.
나는 단독 출마보다는 경선이 훨씬 바람직하다는 입장이었다. 게다가 1050명의 대의원 중 나는 629명의 추천을 받았고, 최 의원은 320명의 추천을 받았기에 승리를 낙관하고 있었다. 게다가 현역 의원 20명의 경우 거의 모두가 나에 대한지지 서명까지 해놓은 상태가 아닌가.
결국 3월 22일 오전 잠실의 교통회관에서는 국민당 제3차 전당대회가 열렸다. 그리고 곧바로 총재 선출에 들어갔다. 투표 결과는 내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1050명 중 710명이 투표에 나섰지만 개표해 보니 나는 456표를, 최 의원은 내 절반에 불과한 246표를 얻는 데 그쳤다. 그러나 내가 당선이 확정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선에 필요한 숫자는 전체 대의원 숫자의 절반인 525표를 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도 69표가 부족했던 것이다. 다시 한 번 결선 투표에 들어가려는데 새로운 의견이 나왔다.
“200표 이상 차이가 났는데, 같은 후보를 두고 다시 투표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결과는 뻔하지 않겠는가?”
대의원들이 최 의원 사퇴를 설득했고, 결국 최 의원은 포기를 선언하게 되었다.
“나는 패자로서 깨끗한 승자인 이만섭 총재에게 지지를 보내며, 자리에 연연치 않고 충실한 당원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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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5년 3월 22일 한국국민당 전당대회에서 직선 총재로 당선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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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호를 보내는 대의원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단상에 오른 나는 최 의원과 뜨거운 포옹을 하곤 총재 취임사를 했다.
“오늘 국민당 당원 여러분의 뜻으로 본인이 당 총재로 선출된 데 대해 무거운 책임감과 함께 송구스러운 마음을 금할 길 없습니다. 우리가 이번 전당대회에서 당헌(黨憲)에 따라 민주적인 방법으로 다른 정당과는 달리 정정당당하게 경선에 의해 총재를 선출했다는 사실은 우리 당의 훌륭한 정치력을 과시한 결과인 것입니다.”
대단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사실 이날 대표 선출은 5공화국 수립 이래 야당 총재를 직접 경선으로 뽑은 효시였다. 그만큼 우리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조선일보》·《중앙일보》등 일간지들은 이를 1면 톱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이러 취임사에서 나는 바로 몇 가지를 정부·여당 측에 강력히 촉구했다.
“……본인은 이 자리를 빌려 이 나라의 자유 민주주의와 민생의 안정을 위해 정부·여당 측에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엄숙히 촉구하고자 합니다. 우선 국민의 뜻에 따라 참다운 평화적 정권 교체를 위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즉각 동의할 것. 둘째, 정치쇄신법을 조속히 폐지하고 모든 정치인의 자유를 보장하며 앞으로 어떠한 정치 보복도 없도록 할 것. 셋째, 의회의 권능을 존중하고 사법부의 독립을 명실 공히 보장할 것. 넷째, 군인은 국토 방위 본연의 의무에만 충실하고 정치적 중립을 지킬 것. 다섯째, 언론과 학원에 대한 관권과 행정력의 개입을 즉각 중지하고 그들의 자율성을 보장할 것. 여섯째, 집회·결사의 자유와 노동권을 회복시킬 것. 이상과 같은 사항은 이 나라 국정의 민주화를 위한 최소한의 필수적 요건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실 대통령 직선제, 군의 정치적 중립 등은 전부터 내가 누누이 주장해 온 것들이었다. 다만 야당 총재로서 나와 국민당의 관철 의지를 다시 한 번 강조했을 뿐이다. 그러나 새로운 내용은 그날 총재로 취임한 후 바로 그 자리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국민 여망에 따라 반드시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을 해야 하며, 또한 이를 위해 국회 내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조속히 구성할 것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개헌 투쟁의 서곡이 된 ‘개헌특위’의 구성을 5공 이후 내가 처음 제의한 것이었다. ‘헌특위’ 문제는 이후 거의 1년여 동안 여야의 쟁점이 되어 논란을 빚다가 1986년 6월 24일 마침내 국회 내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가 설치됐다.
개헌특위 제안은 역시 큰 뉴스였다. 다음 날 각 신문은 지난밤의 국민당 전당대회 소식을 일제히 머리기사로 실었다. 5공화국 들어서 최초의 민주적 절차에 의한 총재 선출이라는 찬사와 함께, 헌특위 기사 또한 큰 활자로 보도했다. 나는 지금도 당시 개헌특위 문제를 처음 꺼내 국회 내에 헌법 개정의 장을 여는 계기를 만들고, 이것이 이후 역사의 전환점이 된 ‘6·29 선언’을 이끌어내는 씨앗이 된 사실을 마음 뿌듯하게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