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내가 노태우 대표를 바라보며 다소 언성을 높였다.
“민정담은 대통령을 올바르게 보좌해야 합니다. 민정당이 모든 준비를 해놓았더라도 대통령이 최종적으로 올바른 결정을 내리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이 잘 수습된다면 그게 대통령을 위해서 좋은 일이지요. 너무 민정당의 입장만 강조하지 마세요.”
잠시 말을 끊은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전 대통령께서 오는 9월 유엔 총회에 가서 연설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학원에 대해 강경한 조치를 위해 놓고 어떻게 유엔에 가서 연설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이 법은 철폐하든가 최소한 보류라도 해야 합니다.”
유엔 연설과 연계시키니 대통령의 표정이 다소 누그러지는 느낌이었다.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이 총재의 충정을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앞으로 시간이 있고 국민당에 율사律士들도 있으니, 미심쩍은 점이 있으면 노 대표와 자주 만나 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유엔총회에 가서 연설하는 것은 아직 결심하지는 않았습니다. 김일성이 고소공포증이 있어 비행기를 못 타 유엔에 오지 않는다는데, 나만 가서 연설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생각도 있습니다만…….”
나는 이왕 내친 김에 민생 문제 등도 꺼냈다.
“학원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도 따지고 보면 빈부 격차를 해소해 중산층의 폭을 넓히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제 사정이 어려운 학생들이게 숙식과 장학금의 혜택을 주어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다면 이들의 급진 좌경화를 방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선 대통령의 생각도 같았다. 전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찬동했다.
“근로자와 농민의 중산층화하자는 것은 내 개인의 신념이자, 정부가 추구하고자 하는 시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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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두환 대통령과 필자 간의 영수회담에 대한 동아일보의 기사(1985. 8.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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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이란 단어가 나오자 나는 잘됐다 싶어 농촌 문제를 끄집어냈다.
“농촌의 실정은 여간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 농촌의 부채는 국가 재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탕감하든지, 또는 그 상환을 유예시켜 주어야 합니다.”
처음과는 달리 전 대통령은 내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나는 아예 ‘직선제’ 문제까지 꺼냈다.
“우리나라의 많은 국민들은 대통령 직선제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국민당도 당 방침으로 직전제 개헌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직선제 얘기가 나오자 대통령은 즉각 말을 받았다.
“헌법도 시대의 변천이나 발전에 따라 필요가 있을 때는 보완할 수 도 있겠지요. 그러나 현 시점에서는 헌법을 고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절대 다수의 국민의 찬성으로 확정된 헌법을 한 번도 시행해 보지 않고 고친다는 것은 국민에 대한 약속 위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때 나는 바로 ‘헌법특위’ 얘기를 꺼냈다.
“헌법 문제에 관에서는 국회 안에 헌법특위를 만들어 다른 나라의 예도 보아가며 여야가 서로 흉금을 터놓고 상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밖에도 나는 외채 문제, 지도층이 솔선하여 근검 절약하는 풍토 조성, 중소기업 육성책, 도시 서민의 생활보장 문제 등 평소 생각을 기탄없이 이야기 하는 것으로 회담을 끝냈다. 청와대 회담을 마치고 바로 정동(貞洞) 당사로 돌아온 나는 기자회견을 통해 회담 내용과 분위기를 설명해 주었다.
“대통령과 기탄없는 의견 교환을 한 결과, 대통령이 내 생각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후 민정당 사람으로부터 전해 들은 얘기로는 그날 나와 회담을 마친 전 대통령은, 그날 밤 민정당 간부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회담 얘기를 꺼냈다고 한다.
“내가 오늘 이만섭 총재와의 회담에서 느낀 게 많소.”
말을 마친 전 대통령은 바로 다음 날 아침 청와대에서 긴급 당·정 회의를 열 것을 지시했으며, 황선필(黃善必) 대변인에게는 ‘학원안정법 보류 성명’을 밤 사이 기초할 것을 지시했다는 것이다. 다음 날 학원안정법 보류 성명이 나왔음은 물론이다. 지금도 나는 그때 학원안정법이 보류된 것은 내 설득이 주효한 때문이라고 믿고 있으며, 정치 생활에서 큰 보람으로 여기고 있다. 그리고 그해 전 대통령은 유엔에 가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