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안정법 보류로 인해 한동안 조성된 여야 간의 화해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85년 말에 열린 정기국회에서 다시 격돌하고 말았던 것이다. 정기국회에서 주요 쟁점으로 대두됐던 ‘조세감면구제법’ 파동이 정가에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당시의 조세감면규제법은 재벌에만 지나치게 혜택이 치중됨으로써 학계는 물론 국민들도 크게 반발하고 있었다. 때문에 당시 선명성을 부각 하려던 신민당은 법안의 심의 자체를 애초부터 거부하는 초강경 대응을 하고 있었다. 나 역시 조세감면규제법에 많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신민당처럼 ‘반대를 위한 반대’ 보다는 야당으로서 대안을 제시해야하며 구체적으로 우리 당이 줄곧 주장해 온 것처럼 농민과 중소기업에도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수정, 통과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 당의 수정안은 구체적으로 중소기업이 휴업·전업·폐업할 때는 세금을 면제해 줄 것, 그리고 농촌에서 바로 구입하는 비료·농약·농기구 및 농기구에 쓰이는 유류에 대해서도 면제 소치를 해주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예 심의조차 거부하는 신민당의 행동에 불만을 품은 민정당은 12월 2일 우리 당이 제시한 수정안 중 극히 일부, 즉 농기구에 사용하는 유류에 대한 면세만을 포함시켜 민정당 재무위 의원들만으로 날치기로 통과 시켰던 것이다.
나는 날치기 소식을 듣고 몹시 화가 났다. 우리 당의 수정안이 대부분 누락된 것도 문제이지만, 도대체 날치기라니 말이나 될 법한 소린가? 날치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나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평소 농성과 같은 극한투쟁보다는 정책 대결을 해왔던 국민당이었지만, 당시로선 힘으로만 밀어붙이는 민정당의 편협한 태도를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우리는 바로 농성에 들어간 신민당에 합세했다.
그날 밤 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대여 관계에 있어서 강경하기만 하면 애국자가 되고, 국민의 이익을 위해 타협에 나서는 사람은 무조건 ‘사쿠라’로 매도당하는 현실이 계속되는 한 민주주의 실현은 요원한 것이었다. 그때쯤 나는 대구의 한 가정주부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정성들여 또박또박 쓴 글을 읽으면서 나는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난세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이 경제난(經濟難)에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는 국민들에게 국회는 오히려 불안이라는 회오리를 던지고 있습니다. ‘파쇼 여당과 게릴라 야당’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 차원을 떠나 나라의 앞날을 생각한다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가슴을 치고 싶지는 않으신지요? 정말 속상합니다. 총재님. 다시 한 번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제발 이 어려움을 수습하시는 데 앞장서서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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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국 경색을 풀기 위해 민정당의 노태우, 신민당의 이민우, 나 여야 3당 대표는 수시로 만나 대화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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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나를 포함한 정치인 모두가 부끄럽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정국은 갈수록 가관이었다. 신민당과 우리 당이 본회의장에서 농성을 하고 있는 가운데, 민정당은 자기 당 소속 의원들을 몰래 의사당 146호실에 모아 문을 잠근 채 새해 예산안까지 전격적으로 통과시켜 버렸던 것이다. 뒤늦게야 이 사실을 안 신민당 의원들은 문을 부수며 저지하려 했지만 이미 상황은 끝난 상태였다.
조세감면규제법의 날치기가 아직 국민들의 뇌리에 남아 있는 상태에서 예산안마저 날치기 통과시켰으니 이는 폭거라 아니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민정당은 문은 부수고 들어온 신민당 의원들은 의사당 폭력이라며 고발 조치까지 해버렸다. 아무튼 이후 정국은 급격하게 경색돼 정치적인 해결에 기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그러던 중 해가 바뀌어 1986년에 접어들었다. 나는 신민당의 이민우 총재, 민정당의 노태우 대표와 3자 회담을 자주 가지면서 타협안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는 날치기로 통과된 예산안과 조세감면 규제법뿐만 아니라, 몇 달 전 전 대통령과 협의한 헌법개정특별위원회의 구성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진통 끝에 나온 결론은 헌특위를 구성하되 그냥 헌법개정특별위원회라고 하면 헌법에 문제가 있는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니 ‘개정’을 빼고 대신 ‘연구’라는 단어를 넣어 헌법연구특별위원회라고 하는 게 어떻겠냐는 민정당의 제의에 최종 합의했다.
나는 헌법 관련 위원회가 구성된다는 것 자체가 개헌을 전제로 한 것인 만큼 명칭에 구애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자칫 명칭을 고집하다가 기구 구성 자체가 무산될 수도 있었다. 또한 새해 예산에서 680억 원을 삭감해 국민의 조세 부담을 경감시키기로 합의했으며, 조세감면규제법의 경우는 다음 회기에서 개정하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고질적인 문제가 다시 발생했다. 양 김씨가 실질적으로 이끌던 신민당에서 헌특위에 ‘연구’자를 붙이는 데 반대, 협상이 결렬된 것이다.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래도 명목상 당 대표인 이민우 총재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면 그 정도는 인정을 해주어야 할 뿐 아니라, 더구나 대여 협상을 담당했던 신민당 간부들조차 사전에 양해를 한 사항인데 그걸 당론이라는 구실을 붙여 뒤집다니 정치 도의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양 김씨의 선명성 경쟁에서 나온 결과였다.
사실 당시 신민당의 행태는 경솔한 점이 있었다. 그때 합의된 대로 진행됐다면 연구라는 글자가 들어가 있을지언정 헌특위도 구성됐을 테고, 국민의 조세 부담도 경감되고, 아울러 조세감면규제법도 다음 회기에서 농민 중소기업에 혜택을 주는 방향으로 고쳐졌을 것이니 그야말로 1석 3조(一石三鳥)의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결국 제1야당의 강경 일변도의 노선 때문에 사태를 진정시키기는커녕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후일 여당에게 ‘호헌(護憲)’의 구실까지 주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