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이 되자, 정국은 더욱 꼬이기 시작했다. 헌법연구특별위원회 설치를 거부한 신민당이 결국 총선 한 돌을 맞는 12일부터 ‘대통령 직선제 개헌 추진 1천만 명 서명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하고는 가두로 진출한 것이다. 물론 정부는 이 서명운동을 불법으로 간주, 원천적으로 봉쇄할 태세였다. 그럼에도 정국은 갈 데까지 가라는 식으로 신민당은 종로 4가에 있는 당사 앞에서 서명 운동을 강행한 반면, 정부는 정부대로 신민당사의 출입문을 봉쇄하며 강경 진압에 나섰다.
신민당은 당사 충입이 봉쇄되자 근처 다방에서 간부회의를 여는 웃지못할 촌극까지 벌어졌다. 국민당의 경우 대화가 우선이라는 생각에 가두로 나서지는 않았다.
정국이 극도로 경색되자 2월 24일, 청와대에서는 대통령과 3당 대표 간에 영수회담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전 대통령은 개헌 서명운동이 부당성을 먼저 거론했다.
“개헌 문제는 국회에서 충분히 논의한 뒤 개정돼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헌법은 나중에 통일이 될 때까지 그 효력이 지속될 수 있도록 완벽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국민이 법을 위반하면 처벌되는데, 정치인이라도 그냥 둔다면 형평에 맞지 않습니다. 법을 지키고 국민을 보호하려는 내 충정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전 대통령은 정국을 대화로 풀기를 당부했다.
“남·북간에도 대화를 하는 마당에 여야간에 대화를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신민당의 이 총재는 대선배시고 만고풍상을 겪었으며, 국민당의 이 총재도 정치를 잘 아는 분이니 우리나라가 어느 방향으로 나가는 게 가장 좋은지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니 대화를 통해 원활하게 국정이 운영되도록 당부 부탁드립니다.”
그러나 신민당의 이민우 총재는 서명운동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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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와대 3당 대표회담에서 / 오른쪽부터 이민우 신민당 총재, 노태우 민정당 대표, 필자, 전두환 대통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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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사람에게 넘겨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임기 중에 진정한 민주화 일정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개헌 서명운동이 법에 위반되고 혼란을 가져온다고 하나, 저의 견해는 다릅니다. 민주 국가에서는 모든 권리가 국민으로부터 나오므로 국민에게 개헌을 요구할 청원권이 있습니다.”
이때 나는 딱딱한 분위기를 조성해 나갔다.
“오늘 회담은 지나간 날의 잘잘못을 따지기보다는, 서명에 대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입니다. 서명에 관해서는 정치적인 해결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아울러 신민당 의원의 기소 문제도 정치적으로 타결되도록 여야가 함께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나는 헌특위 문제를 꺼냈다.
“개헌 등 정치 문제를 비롯한 경제·민생 문제 등은 모두 국회에서 여야가 흉금을 터놓고 대화를 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를 위해서는 국회를 조건 없이 리 여는 게 중요한 일입니다. 개헌 문제에 관해서는 솔직히 말씀드려서 국민의 절대다수가 직선제 개헌을 원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내가 개헌 문제를 꺼내자 전 대통령이 말을 받았다.
“헌법도 사람이 만든 것인 만큼 완벽할 수는 없겠지요. 때로는 개정할 점도 있을 것입니다. 내가 지금 정권을 연정하려는 것도 아니니, 88올림픽 등 민족의 대사(大事)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후에 필요하다면 개헌을 논의하는 게 마땅한 도리가 아닐까요? 민족적 대사를 앞둔 마당에 법 절차를 무시하고 힘을 바탕으로 서명을 강행한다면 정국이 불안해지는데, 그 책임은 누가 지겠습니까?”
나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대통령의 입에서 ‘88올림픽 후 개헌 논의’라는 표현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정부는 개헌 불가에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것이 한발 짝 후퇴해 ‘88올림픽 후 개헌’으로 바뀐 것이다. 나는 못을 박기 위해 다시 한 번 물었다.
“올림픽 후 89년 개헌 논의라는 것은 그때 단순히 논의뿐만 아니라 개헌까지도 할 수 있다고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전 대통령은 분명한 어조로 대답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