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민우 총재는 못 믿겠다는 투로 말을 꺼냈다.
“대통령은 임기만 채우고 더 안하겠다고 하면서 임기가 끝난 후인 89년에 가서야 개헌을 한다고 한다면, 그것을 의심하는 국민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분명한 민주화 일정을 밝혀주십시오.”
이 말은 노태우 대표가 받았다.
“대통령 각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큰 정치로 88년의 국가 대사를 끝낼 때까지는 국론 분열을 막아야 합니다. 손님을 청해 놓고 집안싸움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개헌 문제는 2년 차이인데, 2년 뒤에 본격 논의하자는 것을 못 참는다는 것은 30~40년의 정치 경륜을 가진 사람들의 자세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자 전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나보고 ‘89년 개헌을 보장하라’는 말 같은데, 나는 88년에 그만두는 사람입니다. 때문에 내가 보장한다는 것은 월권 행위입니다. 개헌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국민이 보장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방법은 있을 것입니다. 내가 속한 민정당이 공당公堂으로서 개헌을 국민 앞에 약속하고, 차기 대통령을 후보가 개헌을 공약하는 방법입니다. 아무튼 국회 내에 헌법특별위원회를 설치하는 데는 동감합니다. 명칭이 문제라면, 여야가 상의해서 결정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정도의 내용이라면 회담은 성공이 아닐 수 없었다. 전 대통령은 회담 중간에 이민우 총재에게 섭섭한 마음도 내비쳤다.
“신민당 이 총재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민정당과 견해를 같이할 때는 당론을 바꾸지 말고 여야간의 약속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이 말은 지난 연말 국회에서 3당간 합의된 사실을 실세인 양 김씨의 압력에 의해 철회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나는 회담이 끝나갈 무렵, 몇 가지 문제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
“이렇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헌법연구특별위원회라는 명칭은 여야 간에 말이 많으니, 연구란 단어를 빼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기소된 신민당 의원의 문제는 사법 차원이 아닌 정치적 차원에서 해결돼야 합니다. 또한 경찰이 신민당사를 봉쇄하여 회의조차 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야당 탄압이므로, 앞으로는 이런 일이 절대로 없도록 야당의 활동을 보장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한 전 대통령의 견해는 뚜렷했다.
“서명운동에 대한 경찰의 제지는 다소 지나쳤던 것 같습니다. 내가 그렇게 안 되도록 지시하겠습니다. 그리고 헌특위 문제는 명칭이 문제라면 그냥 헌법특별위원회도 좋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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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민당의 개헌서명을 둘러싼 여야 간의 갈등은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도 표출되었다 / 동아일보 1986년 3월 27일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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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날의 회담은 대성공이었다. 개헌 절대 불가에서 88올림픽 후 개헌을 이끌어낸 데다, 헌법연구특위도 연구를 빼고 헌법특위로 해 일시적으로나마 시국을 타개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던 것이다.
정국이 어수선한 가운데 전두환 대통령은 4월 5일부터 21일까지 영국·서독·프랑스·벨기에 등 유럽 4개국을 순방하고 돌아왔다. 그리곤 순방 보고를 겸해 30일, 3당 대표를 청와대로 초청하여 또다시 시국 전반에 관한 회담을 가졌다. 전 대통령은 귀국 후에도 계속되는 개헌 서명에 불만부터 터뜨렸다.
“……신한민주당은 국민에게 불안을 주고 혼란을 가져오는 가두 서명 운동을 중단하고 국회로 돌아와 기탄없는 대화를 하도록 하십시오. 정부는 합법적인 절차에 른 개헌 논의는 막지 않겠습니다…….”
이민우 총재가 말을 받았다.
“……서명은 내가 제일 먼저 했으며, 이 서명은 어디까지나 당의 행사입니다. 개헌 문제에 관해선 그 시기 결정이 시국을 푸는 관건이 될 것입니다. 화합된 분위기에서 통치자가 결정돼 평화적인 정권 교체를 한다면 88올림픽도 화합된 분위기 속에서 치를 수 있고, 이는 안보에도 도움이 됩니다. 대통령 각하께서 개헌 시기에 대해 결단을 내려 새로운 헌법으로 다음 대통령을 선출하고 물러나게 되면, 역사상 훌륭한 인물로 평가 될 것입니다.”
이민우 총재의 말은 개헌 시기를 앞당기자는 얘기였다.
이번에는 내가 말을 이었다.
“지금은 건국 이래 가장 중요한 고비라고 생각합니다……. 이 고비를 슬기롭게 넘기려면 여야의 모든 지도자가 나만이 대통령이 되겠다든지, 아니면 정권을 꼭 지키겠다든지 하는 생각을 버리고 위국위민(爲國爲民)의 심정으로 대타협에 나서야 합니다……. 야당은 현재 1986년 개헌, 그리고 정부·여당은 1989년 개헌을 주장하고 있는데, 어떻든 임기 내에 반드시 개헌을 하셔야 합니다. 그 전제 아래에서 원내에 개헌특위를 설치해 각 당이 허심탄회하게 투론해야 합니다…….”
나는 공식적으로 ‘임기 내 개헌’ 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내 말을 받는 전 대통령의 말이 좀 이상한 것 같았다.
“……어떤 헌법이 바람직한지를 깊이 연구해야 합니다. 직석제만이 민주이고, 간선제는 비민주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우리 역사상 직선제를 여섯 번이나 했어도 집권자가 평화적으로 정권을 내놓은 적이 있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