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뜻 전 대통령이 내각제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전 대통령은 유럽 순방을 하며 느낀 점을 말하면서, 그들이 채택하고 있는 내각책임제의 장점을 나라별로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물론 전 대통령이 내각제로 개헌하겠다는 분명한 얘기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은근히 내각책임제가 좋지 않으냐는 식으로 논리를 전개했다. 유럽의 내각제에 대해 설명을 마친 전 대통령은 결국 한 걸음 양보하기에 이르렀다.
“재임 중에 개헌을 해달라고 하는데, 국회에서 여야가 합의해 건의하면 재임기간 중에도 개헌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그토록 국민이, 그리고 국민당을 비롯한 야당이 원하던 ‘임기 내 개헌 가능’을 처음 언급한 것이다. 이민우 총재는 귀가 의심스럽다는 듯 전 대통령의 말을 재차 확인했다.
“그렇다면 후임 대통령은 새 헌법에 의해 선거하게 되는 것입니까?”
“국회에서 합의한다면 반대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1988년까지는 현행 헌법을 지켜 평화적인 정부 이양과 올림픽 등 대사를 치른 후 국민의 뜻에 따라 개헌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전 대통령은 다소 후퇴하는 발언으로 확실한 답을 피했다. 이번에는 내가 다시 확인하는 질문을 했다.
“국회 헌법특위에서 각 당이 안을 내 정치 일정까지도 합의한 뒤 건의 한다면 따르신다는 말씀이군요?”
그러나 전 대통령은 여전히 확실한 답을 피했다.
“그렇게까지 크게 양보했는데, 신한민주당이 계속 길거리에서 개헌 서명을 하시겠습니까? 서로가 믿어주어야죠. 국회에서 공개적으로 논의 한다면, 이후는 국민들이 판단할 것입니다.”
그날 회담은 분명한 성과가 있었다. 여야 합의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었지만 어쨌든 올림픽 이후 개헌에서 임기 내 개헌 가능성으로 바뀌었으니 주목할 만한 진전이었다. 그만큼 당시 여당은 국민의 열화와 같은 개헌 요구에 밀리고 있었다.
전 대통령은 회담이 끝날 무렵 노태우 대표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건냈다.
“노 대표께서 김영삼 씨를 한번 만나보시죠.”
이는 김영삼 씨를 실세로 인정하겠다는 얘기와 다름없었다. 아무튼 회담 성과는 만족할 만했다. 그러나 잘 풀릴 것 같았던 정국은 사흘 뒤 터진 ‘5·3 인천사태’로 더욱 어려워지게 됐다. ‘4·30 청와대 회담’에서 내가 말했듯 건국 이래 가장 심각한 고비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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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6년 5월 3일 인천에서 일어났던 대규모 시위를 보도한 경향신문의 기사 / 당시 언론 보도는 부정적인 논조이나 이 대규모 민중 봉기는 6.10항쟁으로 이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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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5월 3일은 신민당 개헌추진위원회 경인지부 결성식 및 현판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대회장인 인천시민회관 주변에는 일찌감치 인파가 몰려들었다. 운동권 학생이 주축인 이들은 정오께부터 곳곳에서 시위를 벌였다. 최류탄을 쏘며 저지하는 경찰에 시위대는 화영병과 보도블록을 던지며 맞섰다.
이날 시위로 재야 및 운동권 단체는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공안당국은 5·3 인천 시위를 좌경 용공세력의 반정부 폭력 행위로 규정, 대대적 검거에 나섰다. 제도권 야당인 신민당과 재야 및 학생 운동권 세력을 떼어놓으려는 의도였다. 신민당의 개헌 서명운동 추진 과정에서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떠오른 재야 및 운동권은 당시 개헌을 위해 신민당과 한시적으로 제휴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신민당의 개헌 서명운동도 벽에 부닥쳤다. TV로 그 장면을 지켜본 나 역시 극도의 불안과 실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누구를 두둔하거나 나무라기 전에 이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지 심각하게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2차적인 책임은 정부 당국에 있었다. 사태의 원이 어디에 있건, 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국정을 맡고 있는 정부에 그 책임이 있는 것이다. 설사 시위대가 경찰의 발표대로 ‘용공세력’이라고 해도 그런 세력이 발생하게 한 책임은 바로 정부에 있는 것이다. 또한 두 번 그런 세력이 발생하게 한 책임은 바로 정부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신민당에도 책임이 있었다. 나는 ‘4·30 청와대 회담’에서 전 대통령이 양보도 했으니 일단 장외에서 장내로 방향을 돌리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