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시절, 그래도 잊을 수 없는 일은 역시 연고전이었다. 특히 나는 응원단장이었기에 더욱 기억에 남는다. 당시 연고전은 지금과는 달랐다. 한마디로 양고뿐만이 아닌 서울 시민의 축제였으며, 과열보다는 화합된 분위기에서 치러졌다. 때문에 선수들이나 관중들이나 서로 충돌하는 일이 드물었으며, 항상 서로 추켜세워 주려고 노력했다.
지금과는 달리 처음에는 축구 시합만 하다가 나중에 5개 종목으로 늘어났지만, 응원단장이 서로 상대 학교의 응원을 지휘할 정도로 분위기가 좋았다. 서울운동장에서 경기가 끝나면 연세대는 종로를, 고려대는 을지로를 점거(?)해 시가행진을 벌렸다. 온통 주변에 있는 막걸리집의 막걸리는 연․고대생들의 차지였다.
당시 내 파트너 격의 고려대 응원단장은 박래옥(작고)으로 이후 금융계에 투신했다. 연세대의 축구부 주장은 바로 오완건(전 축구협회 부회장)이었고, 농구부 주장은 윤한성이었다. 응원단장을 맡았던 인연으로, 난 국회의장을 맡기 전까지만 해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연고전을 참관했으며, 그밖에 지금까지도 고려대 출신 정치인들과는 꽤 친하게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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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세대 응원단장으로 활약하는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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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또 한 가지 잊을 수 없는 일은 1956년 소련군이 탱크를 앞세워 헝가리를 강점하려 하자 헝가리 국민들이 결사적으로 대항함으로써 ‘헝가리사태’가 발생했을 때였다. 피가 끓어 이를 차마 보고 있지 못하던 나는 헝가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우리 학교 안에 ‘헝가리 학도 의용군’을 조직했던 것이다.
우리들은 곧바로 김용우 국방장관실로 찾아가 우리의 뜻을 전달하고 헝가리로 달려갈 것을 요청했으나 국방부 당국은 우리의 충정은 이해하면서도 국제 관계상 불가능하다는 이유를 들어 우리를 만류했다. 그때 같이 행동한 학생은 김각(전 코리아 헤럴드 논설위원), 남홍우(전 대사), 김선하(재미 사업가) 등이며 후배로서 유재건(전 국회의원), 조덕행, 손영태(재미) 씨 등이 있었다.
이 일로 인해 나는 2002년 3월 헝가리를 공식 방문했을 때 헝가리 국회의사당 내 대통령 집무실에서 페렌츠 마들 대통령으로부터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헝가리 최고 명예훈장인 ‘십자대훈장’을 수여 받았다. 마들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훈장 제정사를 통해 1956년 당시 나의 깊은 뜻과 의로운 행동을 높이 평가하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의장님께서는 1956년 당시 헝가리 독립전쟁을 지원하기 위하여 한국에서 지원군을 조직했던 의인 중의 한 분이셨으며, 당시 대학의 지도급 학생으로서 동료들과 함께 헝가리로 건너와 소련 점령군에 대항하는 독립전쟁에 참여하려 하셨습니다. 비록 당시의 정황 상 그 계획이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먼 한국에서 소련독재에 항거하는 헝가리인들의 노력을 알리고 공론화하는데 일조하였습니다. 따라서 본인은 이 자리를 빌어 헝가리 국민들을 대표하여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헝가리 국회의사당 대통령 집무실 앞을 흐르는 아름다운 다뉴브 강의 물결을 바라보면서 나는 감격에 젖어 다음과 같은 답사를 했다.
“본인은 오늘의 이 감격스런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46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으나 이를 기억해주시고, 당시 헝가리의 반소(反蘇) 항거 지원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어 국내의 여론을 환기시켰을 뿐, 실제로 이곳에 와서 함께 싸우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큰 훈장을 받으니 한편으로는 감사하나 또 한편으로는 부끄러운 생각마저 듭니다. 본인은 이미 몇 개의 훈장을 받은 경험이 있으나, 오늘 이 훈장이야말로 가장 값진 것으로 영원히 가슴 속에 간직될 것입니다. 오늘 이 훈장 수여가 한국과 헝가리 양국의 우호 증진과 양국 민간의 사랑이 더욱 깊어지는 새로운 계기가 될 것으로 확신하는 바입니다.”
1957년 졸업을 앞둔 난 고민이 앞섰다.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는 이상 정치가의 길을 걷는 게 순리였지만, 당시 동기들보다 졸업이 늦은 나로서는 빠른 길을 생각해야 했다. 난 직접 정계로 나가느냐, 아니면 외무부로 진출해서 외교관이 되느냐, 또는 언론계로 가 지름길을 택하느냐를 두고 고민해야 했다. 이렇듯 내가 고민하고 있을 때 내게 길을 열어준 사람은 바로 지금의 아내였다. 당시 나는 KBS에 다니는 동창의 소개로 <경향신문> 조사부에 다니고 있는 한윤복(韓潤福)기자와 교제하고 있었다.
후일 내 아내가 된 한윤복 기자는 나이는 나와 동갑이었으나 학번은 한 해 아래였다. 그녀는 진명여중 6학년 때 6.25동란이 일어나 진해로 피난 갔다가 1953년에 서울로 돌아와 서울신문학원(곽복산 선생이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언론 전문학원으로 요즈음의 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해당됨)을 제 1회로 졸업한 후 경향신문사에 입사하여 문화부에서 일하다 나중에 조사부로 옮겼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1956년 어느 날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를 잊지 못한다. 당시 약속장소인 광화문의 <리리다방>으로 가면서 나는 사실 걱정했다. 점심도 굶고 다닐 정도로 고학을 하는 형편이라, 물론 커피 값도 내지 못할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 만난 그녀는 주관이 뚜렷하고 검소한데다 생각도 건전해 내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내가 결정적으로 결혼을 결심(?)하게 된 것은 내 고민을 아는지 그녀가 다방을 나가면서 선뜻 커피 값을 지불했기 때문이었다. 당시만 해도 남녀가 만날 때는 식사나 찻값은 으레 남자가 내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난 시원시원한 그 모습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난 지금도 농담으로 집사람에게 ‘커피 한 잔’에 팔려(?)왔다고 말하곤 한다. 그만큼 그때는 커피 값을 선뜻 내준 그녀가 그렇게 믿음직스럽고 마음에 들었다. 그런 그녀와 사귀고 있었는데, 그녀가 내 갈 길에 조언을 해준 것이다.
“우선 언론계로 간 되, 정계로 가는 게 좋겠어요.”
나도 그녀와 같은 생각이었다. 나 자신도 언론계에 투신하여 자유당 독재를 붓으로 고발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