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시 어려운 시기에 이들 세 사람이 우리 당의 공술인을 맡아준데 대해 지금도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이미 밝힌 대로 민정·신민 양당이 장외 경쟁으로 나가 결국 공청회는 열리지 못했다.
나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민정·신민 양당이 한 발씩 양보해 타협할 것을 촉구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우리 당은 공청회 장소는 신민당 주장대로 넓은 곳으로 정하고 공술인도 지역 사람들로 하되, TV 생중계는 신민당이 양보하여 하지 않는다는 타협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결국 장외 투쟁으로 한 달여가 지나가고 말았다. 나는 계속 이렇게 시간만 낭비한다면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국민의 눈이 저치권을 그냥 두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공청회 문제를 9월까지 해결치 못하고 넘긴다면, 헌특 무용론(無用論)이 대두될지도 모른다.’
나는 야당 쪽에 강력히 경고했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당시 9월 20일부터 아시안게임이 열려 9월 말부터는 국민의 관심이 자연히 정치로부터 떠날 것이며, 그렇게 질질 끌다보면 정부·여당에 자칫 빌미를 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역시 내 생각은 옳았다. 9월 중순으로 들어서자 학원과 일부 급진 세력에서 ‘헌특 분쇄론’이 나돌기 시작했다. 합의 개헌은커녕 정쟁政爭만 일삼는 정치권에 대한 실망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29일 한창 아시안게임이 벌어지고 있을 때 헌특위에 문제가 발생했다. 다시 신민당의 이민우 총재는 김영삼·김대중 씨 등 실세(實勢)들과 3자 회담을 열고 양 김씨와 전 대통령 간의 실세 대화가 열리기 전까지 헌특위 활동을 일시 중단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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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시 야당을 이끌던 김대중, 김영삼 씨와 이민우 신민당 대표 /오른쪽은 김영삼의 비서실장인 김덕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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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헌특위의 앞날이 걱정됐다. 이러다간 자칫 헌특위가 아무 일도 하지 못한 채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경우 개헌은 물 건너가고, 정국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으로 빠져들지 모른다는 게 당시 내 판단이었다.
나는 신민당의 행동이 경솔했음을 개탄했다. 당직자 회의에서 나는 그들을 강력히 성토했다.
“신민당의 헌특위 불참 결정은 개헌 정국은 물론 나라의 앞날에도 도움이 되질 않는다. 실세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지만, 실세 대화는 나름대로 추진하면서 개헌특위는 정상 가동해야지 3당 대표간 합의에 의해 구성한 국회 개헌특위를 이제 와서 일방적으로 헌신짝처럼 내팽개친다면 이는 무책임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헌특위를 결렬시킨 신민당은 10월 7일, 군산에서 직선제 개헌 추진대회를 개최하면서 다시 장외로 돌아섰다. 이렇듯 어수선한 가운데 10월 10일 정기 국회에서는 3당 대표연설이 있었다.
민정당 노태우 대표는 양 김씨를 은근히 비난했다.
“우리 당은 의원내각제 개헌을 반드시 관철시킬 것입니다. 우리 당은 의원내각제로서 성숙한 선진 민주정치의 실현을 다짐하고 있는데, 실세 대화를 구실 삼아 국회 밖으로 뛰쳐나가는 게 정말 옳은 일입니까? 아마 야당 내의 많은 양식 있는 사람들도 본인과 같은 생각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민우 대표는 비난을 비켜가며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현 단계에서 민주화의 핵심은 국민의 자유로운 정부 선택권을 보장하는 대통령 직선제의 실현입니다. 그러나 여당의 생각이 그러다하면 대통령 직선제와 내각책임제, 즉 개헌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에 대해 국민에게 직접 선택하게 할 것을 제의하는 바입니다.”
국민에게 선택하도록 국민투표를 실시하자는 얘기였다.
나는 우선 파국은 막아야겠다는 대국적인 견지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국민 절대다수는 정부 형태의 장·단점을 논하기에 앞서 최고 통치권자인 대통령을 직접 내 손으로 뽑아보겠다는 강력한 희망과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개헌 작업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지난 헌특위가 절차상의 문제로 중단된 것은 국민의 불신은 물론, 개헌 자체에 대한 국민의 기대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대타협을 이루려면 무엇보다 여야 정치 지도자들은 사심과 당리당략을 버리고 또한 정치권 차원에서 과감히 벗어나야 합니다. 그동안 정치 지도자들은 그들의 입장과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겉으로는 타협을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집권욕과 당리당략만을 추구해 왔습니다. 도대체 나라의 파국이 오고 난 뒤에 누가 대통령이 되고, 누가 국회의원이 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