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와 같이 여야 모두를 향해 타협할 것을 강력하게 촉구했다. 다음 날 《조선일보》에는 “파국 뒤에 누가 대통령이 된들 무슨 의미 있나”라는 내 말을 제목으로 뽑아 큰 기사로 다루었다. 그러나 대표연설은 그저 연설일 뿐이었다. 이후에도 여야의 힘겨루기는 계속됐고 정부·여당은 국민의 직선제 개헌 열기가 누그러지지 않아 초조함을 느낀 탓인지 무리수를 연발했다.
10월 14일 신민당 소속 유성환 의원이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이 나라의 국시(國是)는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어야 한다’는 내용의 발언을 하자 정부는 ‘유성환 의원이 대정부 질문 원고를 기자들에게 사전 배포함으로써 북괴의 활동에 동조하여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했다’ 고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국회에 유 의원의 체포동의안을 제출했다.
이에 민정당은 야당의 극력 반대 속에서 ‘유성환 의원 체보 동의안’을 참의원 회의실(지금의 예결위장)에서 날치기로 통과시켜 버렸다. 유 의원은 곧바로 구속되었으며 1심에서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고 270여 일간 감옥살이를 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나는 유 의원이 감옥에 있는 동안 정당은 달랐지만 면회를 다녀오기도 하고 집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후 유 의원은 1991년 11월 14일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유 의원이 국회 대정부 질문 원고를 기자들에게 원내 발언에 앞서 배포함 행위는 헌법 제45조에 규정된 국회의원의 면책특권의 대상에 포함돼 재판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공소기각 판결을 받았다.
이후 1992년 9월 22일 대법원도 공소기각 판결을 내려 유 의원의 무죄를 확정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국시 발언 파동은 웃지 못할 사건이었다. 아무튼 유 의원의 국시 발언 파동은 국시 논쟁과 국회의원 면책특권의 범위를 둘러싼 논란을 불러일으키면서 여야가 더욱더 첨예하게 대치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후에도 정부·여당은 계속 더욱 강경하게 나갔다. 10월 28일에는 건국대에서 ‘독재 타도’, ‘분단 구조 철폐’, ‘조국 통일의 실현’ 등을 외치며 열린 22개 대학생 연합 시위를 2대의 헬기와 8천 명의 경찰을 동원한 진압 작전을 펴, 1400여 명의 연행 학생 중 1284명에게 구속 영장을 발급하는 등 전대미문의 학생 구속 사태를 빚기도 했다. 아무튼 정국은 긴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김대중 씨는 11월 5일 성명을 통해 폭탄선언을 했다.
“만일 직선제가 개헌이 되면 나는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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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대중 씨는 직선제 개헌을 하면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정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동아일보 1986. 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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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씨가 이렇게 나오자, 당시 유럽 순방 중 독일의 본에 있던 김영삼 씨도 화답했다.
“김대중 의장의 사면복권이 이뤄지면 그를 대통령 후보로 지지하겠다고 수차 김 의장에게 밝힌 바 있으며,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때문에 김대중 의장이 직선제 개헌을 조건으로 한 대통령 불출마 선언을 했음에도, 나중에 직선제 개헌이 되면 나는 김 의장이 출마할 수 있도록 그를 적극 도울 생각이다.”
두 야당 지도자의 이 같은 발언은 당시 국민들에게는 상당한 신뢰를 얻은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알다시피 1987년에 정작 직선제가 된 후로는 두 사람 모두 말을 바꿨고, ‘국민에 대한 약속’을 저버렸던 것이다. 한편 그 당시 정국은 경색됐지만, 나는 끝까지 대화를 강조했다. ‘국회에서 대화를 통한 합의 개헌 노력’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했다. 기자간담회에서도 항상 대화를 강조했다.
“교착 상태에 빠진 헌특위를 무조건 재개해야 하며, 신민당이 제안한 선택적 국민 투표도 여기서 의제에 포함시켜 다루면 될 것을 서로가 힘대결로만 나가니 답답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여야가 합의한 헌특위 시한은 정기 국회까지로 돼 있으나 대화와 타협에는 시한이 있을 수 없으니 헌특위 시한은 연장돼야 하며, 이를 위해서도 정기 국회 폐회 전에 반드시 헌특위를 재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여야의 대치는 더욱 심각한 상황으로 번져, 결국 “민정당이 단독 발의로 내각제를 통과시키려고 한다”라는 말까지 나오게 됐다. 이에 질세라 신민당도 11월 13일 또 다른 선전포고를 했다.
“직선제 추진 서울대회를 11월 29일에 열겠다.”
정국은 이제 일대 격돌이 불가피해졌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