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당이 11월 29일에 직선제 추진 서울대회를 열겠다고 발표함으로써 정국이 어순선한 가운데 느닷없이 ‘김일성 사망설’이 터져나왔다. 그러나 이 사건은 며칠 후 사실무근임이 밝혀져 국방부를 비롯한 정부에 대한 불신은 더운 높아지기만 했다.
그뿐 아니라 정부는 북한이 금강산댐을 건설하고 있다고 발표, 국민의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이즈음인 11월 25일 3당 대표들은 국회의장실에서 노신영 국무총리와 이규호(李圭孝) 건설부 장관으로부터 금강산댐 건설에 대한 설명을 들을 기회를 갖게 됐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시국에 대한 의견도 교환했다.
노신영 총리는 이민우 총재에게 요청했다.
“신민당에서 추진하는 서울대회는 지난번 5·3 인천대회 때보다 훨씬 더 큰 불상사가 일어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서울대회를 중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노태우 대표도 거들었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우선 서울대회를 중지한 뒤 차선책을 강구해 봅시다.”
나는 중재하는 입장에서 입을 열었다.
“북한이 금강산댐을 만든다고 하고, 죽었다던 김일성이 살아나는 등 어수산한 때 정국마저 양극으로 치닫고 있어 국민들이 매우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 파국은 막아야 하니 우선 헌특위를 정상화해 개헌 논의를 국회내로 끌어들이고, 여기에서 이민우 총재가 제의한 선택적 국민투표도 함께 논의하도록 합시다.”
그러나 내 말이 끝나자마자 노태우 대표와 이민우 총재는 서로 헌특위 결렬의 책임을 상대방에서 전가하면서 한참 설전을 벌였다.
내가 나섰다.
“지나간 문제는 얘기할 것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루빨리 헌특위를 열어 현재 12월 18일로 돼 있는 헌특위 시한부터 연장시켜 대화 창구를 다시 열어야 합니다.”
그러나 나의 중재도 소용없이 그날 회의는 평행선만 달렸다. 결국 노신영 총리가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굳이 서울대회를 강행하겠다면 불상사를 막기 위해 정부로서는 공권력을 투입해서라도 원천봉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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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민당의 직선제개헌 집회는 경찰의 원천봉쇄로 취소되었다 (동아일보 1986. 11.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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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통첩이었다. 결국 성과 없이 헤어졌고, 11월 29일에 열릴 예정이던 신민당의 직선제 추진 서울대회는 경찰의 원천봉쇄로 무산됐다. 그 날의 을씨년스런 서울 거리와 방패를 들고 거리를 메운 전경들의 모습은 외신을 통해 전 세계로 전파를 탔다.
경색된 정국은 실타래처럼 엉켜서 좀처럼 풀릴 줄을 몰랐다. 12월 2일 국회에서는 새해 예산안 통과가 예정돼 있었다. 그러나 여야 대치 상황을 감안할 때 예산안의 순조로운 통과는 애당초 기대하기 어려웠다. 당국의 원천봉쇄로 직선제 추진 서울대회를 치르지 못한 신민당은 더욱 강력한 원내 투쟁을 하기 시작했다. 신민당은 대회 무산에 대한 국무총리의 사과를 강하게 요구하면서 “국무총리의 사과 없이는 예산안 통과도 없다”고 버텼다.
신민당이 본 회의장 단상을 점거한 채 예산안 통과를 막자 민정당은 또 다시 무리수를 썼다. 민정당은 난국을 대화로 풀어갈 생각이 아예 없었다. 힘으로 밀어붙이면 된다는 식이었다. 민정당은 회의실도 아닌 민정당 의원실에 소속 의원들을 모아놓고 최영철(崔永喆) 부의장의 사회로 예산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1년 전과 똑같은 날치기 통과가 재연된 것이다.
나는 예산안 날치기 통과로 정치가 한참 궤도를 이탈했음을 감지했다. 여당의 밀어붙이기가 현실화되면서 개헌 전선에 이상 기류가 형성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12월 6일 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는 민정당과 신민당의 강경 대치를 푸는 데 제2야당인 국민당이 완충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에서였다. 회견에서 나는 민정당의 독선적 정국 운영을 비판하는 한편 대회 정치를 강조했다.
“민정당 단독의 개헌 발의는 결코 있을 수 없으며, 만일 단족 발의를 강행한다면 그것은 합의 개헌 정신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므로 국민이 이를 용납지 않을 것이다. 현 난국을 수습하기 위해 대통령과 3당 대표 간에 회담을 다시 열 것을 촉구하는 바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