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날 회견에서 기자들은 다른 질문을 했다.
“민정당과 신민당은 서로 개헌과 관련해 국민당과 제휴하려 하는데, 혹 국민당이 대통령 직선제 당론을 재검토할 필요는 없습니까?
이런 질문은 전혀 뜬금없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당시 민정당에서는 내각책임제 개헌을 위해 타당(他黨) 의원들에게 손을 뻗쳐 포섭 공작을 하고 있었다. 그 여파로 신민당의 일부 의원들은 신민당을 탈당, 신보수회(新保守會)를 만들어 내각책임제를 공공연히 지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정가와 국민들은 캐스팅보트를 쥔 국민당의 향방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 정가의 관측통들은 국민당이 1구 2~5인의 중선거구제로 국회의원 선거법 개정을 보장받는다면 당록은 내각 책임제로 바꿀 수도 있을 것이란 추측도 하고 있던 실정이었다.
그러나 나의 소신은 확고했다.
“국민당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 당론은 아무런 변화가 없으며,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추진해 나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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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6년 기자회견하는 필자/ 사진출처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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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단호한 어조로 답변하며 기자회견을 끝냈다. 정치는 소신이 있어야 하며, 국민의 눈을 무서워해야 한다. 사실 국민당 당내에서도 말이 많았다. 일부 의원들은 어차피 당장 집권할 수 없다면 국회의원 선거법을 중선거구제로 개정하고 내각책임제 개헌을 통해 장래를 도모하는 게 좋다는 생각을 내게 얘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더욱이 기업을 경영하는 의원들은 나를 찾아와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총재님, 죽겠습니다. 뭐 뾰족한 방법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지난 1981년 대통령 직선제를 최초로 제안한 이후,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지켜온 대통령 직선제에 대한 소신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아울러 내각 책임제가 아무리 정치인의 입장에서 바람직한 일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대통령을 내 손으로 직접 뽑겠다는 여활와 같은 국민들의 희망과는 바꿀 수 없다는 것이 나의 확고한 생각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당국의 압력 때문에 입장이 곤란한, 사업을 하는 의원들에게는 이렇게 말하면서 당론 분열을 막기도 했다.
“입장이 곤란할 때는 ‘나는 내각제도 좋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총재의 고집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소.’라고 나한테 그 책임을 미루시오.”
사실 당시 우리 국민당은 위태로웠다. 20석으로 가까스로 원내 교섭 단체를 구성하고 있었기에, 1명이라도 이탈하면 큰일이었다. 이미 제1야당인 신민당에서는 이탈자가 생겨 신보수회를 만든 상태가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제2야당인 국민당이 끝까지 대통령 직석제를 고수한 것을 오늘날에도 정가에서는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처럼 대통령 직선제에 대한 내 소식은 확고해 12월 10일경에는 이민우 총재와 만나 의견을 조율하기도 했다. 언론에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종로구 청진동에 있는 한식당 ‘장원’에서 그와 만나 직선제를 계속 밀고 나가자고 서로 다짐한 바도 있다. 나는 이 총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각제 역시 민주주의의 좋은 제도임에는 틀림없으나 지방자치제, 얼론의 자유, 정당의 확고한 기반 들이 전제되지 않는 한 우리나라 정치 풍토에서는 아직 적절치 못하니 대통령 직선제를 밀고 나갑시다.”
그리고 나는 일주일 후인 17일에는 남산의 외교구락부에서 신민당 고문인 김영삼 씨와 비밀리에 만났다. 이 만남은 전부터 서로가 잘 알고 지내던, 과거 조병옥 박사의 비서였던 조승만 씨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 사실 난 김 고문으로부터 전부터 한번 만나자는 요청이 있긴 있었다. 나 역시 한번 만나고 싶었기에 회담은 쉽게 성사됐다. 당시 김영삼 고문이 만난 정당 대표로는 내가 처음이었는데, 그건 내가 얼론계 시절부터 그와 인간적으로 잘 알고 지냈기 때문이다.
이날 회담에서 우리 둘은 나라의 파국을 막기 위해 개헌 문제를 원내에서 다룰 것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위해 공동 노력할 것을 합의했다. 아울러 나는 김 고문에게 부탁도 했다.
“전부터 청와대 회담 때마다 느낀 것이었지만, 제1야당인 신민당에 총재가 따로 있고 실세가 따로 있어 어려움이 많소. 그래서인데 뒤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보단 떳떳하게 당 표면으로 나서서 난국을 풀어나가는 게 좋을 것 같소.”
물론 내 말에 김 고문도 수긍했다. 이날 회동은 사실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으나 《조선일보》의 김현호(金玄浩) 기자가 어떻게 알고 왔는지 그 자리에 나타났기에 우리는 네 가지 사항을 공동 발표했다.
첫째, 정치에 대한 국민의 신뢰 회복과 국가의 장래를 위해 정치는 사심(私心)과 당리당략을 떠나 국민을 의식하는 바탕 위에서 이뤄져야 한다.
둘째, 개헌 문제는 국회 내에서 논의한다는 원칙에 인식을 같이 한다.
셋째,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민주화를 위해 최선의 공동 노력을 기울인다.
넷째, 민주 발전과 난국 타결을 위해 필요할 때는 두 사람이 언제든지 만나 의견을 나눈다.
이날 우리의 전격 회동은 정가에서는 놀라운 사건이었다. 때문에 민정당국과 당국은 크게 놀라 특종보도를 한 조선일보사에 압력을 넣기도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위해 공동 노력하기로 합의”라고 《조선일보》지방판에 크게 보도되었으나 나중에 서울판에서는 ‘대통령 직선제’라는 단어가 사라지고 ‘합의 개헌을 위해 공동 노력’으로 바뀌고 말았다.
이날 밤 민정당의 노태우 대표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이 총재, 이럴 수 있습니까”라고 강하게 항의했으나 나는 “무슨 소리요, 우리가 나라를 구할 길은 직선제 밖에 없소”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로써 나와 국민당의 직선제 개헌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국민들도 확실히 알게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