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가운데 느닷없이 연말 정국을 강타한 사건이 터졌다. 바로 24일의 ‘이민우 선언’이었다. 이는 정부 당국이 언론의 자유, 구속자 석방, 지방자치 등 제반의 민주화 조치를 단행한다면 내각제 개헌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보름 전 이 총재와 한식당 ‘장원’에서 만났을 때 그가 내게 내각제에 대해 의견을 묻기에 나는 “지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줄 아느냐”며 “내각제의 ‘내’자도 꺼내지 말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렇게 빗나갈 줄은 몰랐따. 한편으로는 그 선언이 과연 양 김씨와 합의된 제안인지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일주일 전 김영삼 고문은 나와 만나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위해 공동 노력하기로 합의까지 하지 않았는가.
역시 예상대로 이민우 선언은 이민우 총재 단독 작품이었다. 신민당은 이민우 총재에 대한 비판으로 들끓었다. 국민 반응도 호의적이지 않았다. 당 안팎의 압력에 시달린 이민우 총재는 며칠 후 온양에 내려가 있던 김영삼 고문을 찾아갔다. 그러나 김영삼 고문은 이민우 총재가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산행을 떠나버렸다. 이민우 구상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의 표시였다. 이를 두고 정가에서는 “한 사람은 산으로, 한 사람은 온천으로”라는 말이 잠시 유행하기도 했다.
아무튼 연말 정국은 이렇게 어수선한 가운데 흘러갔다. 12월 27일 3당 대표가 조촐한 송년 모임 형식으로 롯데호텔에 모인 자리에서 간단한 합의문만 남겼을 뿐이었다.
“내년 1월 중 공식 대표회담을 열고 임시 국회를 소집하여 계속 개헌 논의를 한다.”
드디어 1987년 새해가 밝았다. 여전히 민정당은 합의 개헌에 성의를 다하지 않았고, 신민당도 개헌 문제는 제쳐둔 채 이민우 선언을 둘러싼 내분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1월 15일, 대형 사건이 터졌다. 전국이 추위로 꽁꽁 얼어붙어 있는 가운데 ‘서울대생 박종철(朴鍾哲) 군 고문치사 사건’이 터진 것이었다. 그날 당사에서 석간신문을 뒤적이던 나는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제목의 기사에 충격을 받았다. 구체적인 얘기가 써져 있진 않았지만, 내 예감에는 십중팔구 예사롭지 않은 죽음으로 판단됐다.
| |
|
|
|
| |
▲ 박종철 군의 의문사를 다룬 동아일보 기사 (1987. 1. 16) |
|
|
다음 날 경찰은 “취조 중 책상을 주먹으로 탁 치며 혐의 사실을 추궁하자 박 군이 갑자기 억 하며 책상 위로 쓰러졌다”고 공식 발표를 했다. 어처구니없는 발표로 국민의 의구심만 더욱 증폭됐다.
여당에 최악의 악재가 터진 16일은 마침 그간 서먹서먹한 관계였던 이민우 총재와 김영삼 고문이 회동한 날이기도 했다. 이민우 총재는 회동 뒤 ‘이민우 선언은 직선제 개헌 관철의 한 방안’ 이라고 후퇴함으로써 개헌 논의는 원점으로 돌아갔고, 야당은 다시 뭉치는 계기가 됐다. 신민당과 재야는 박종철 군 사건을 강하게 몰아붙였다. 결국 19일에 검찰의 수정 발표가 있었다.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인 박종철 군을 1월 14일 오전 8시 10분쯤 하숙집에서 연행했다. 2명의 수사관은 서울대 민추위 사건의 주요 수배자인 박종운(朴鍾雲) 군의 소재를 캐물었다. 그러나 박종철 군이 진술을 거부해 수사관들이 위협 수단으로 조사실에서 박 군의 머리를 욕조 물에 한 차례 집어넣는 과정에서 급소인 목 부위가 욕조 턱에 눌려 질식, 사망했다.”
그 발표를 듣는 순간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이제 더 이상 이 정권은 존립할 가치가 없어졌다. 이유도 명분도 없다……. 이런 일이 민주 법치국가인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다니 말이나 되는 소린가?’
나는 곧바로 의원 총회를 소집했다. 그리고 정부·여당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토록 했다.
“도덕성과 성실성을 상실한 민정당 정권에 대항하여 어떠한 희생과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민주 독재정치를 추방하고 박탈된 정부 선택권을 국민에게 되돌려주어 참다움 민주정치를 실현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입니다.”
그날 나는 남을 이루지 못했다. 분노도 분노지만, 정치인으로서 스물 한 살의 어린 생명을 책임지지 못한 데 대해 더욱 죄스러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