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으로 시작된 1987년은 파란의 연속이었다. 김종호(金宗鎬) 내무장관과 강민창(姜玟昌) 치안본부장이 경질되는 등 사태 수습에 가닥을 잡아가는 중에, 이번에는 부산 형제복지원과 대전 성지원에서 엄청난 인권 유린 사태가 터졌다.
이제 국민들의 원성은 국회로 쏠렸다. 그렇지 않아도 할 일이 태산 같은데 각기 자당(自當)의 이익만 내세워 싸움질만 하고 있으니 더더욱 사회가 혼란스러워 이런 사태를 빚었다는 것이 여론이었다. 사실 국민들에게 정치인은 면복이 없었다. 국민들이 원하는 개헌은커녕 국회조차 열지 못하는 판이니 할 말이 없을 따름이었다.
여론의 질타가 거세지자, 여야 3당 대표는 2월 18일 저녁 국회 귀빈식당에서 어려운 시국을 풀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다. 이날의 주요 의제는 인권 문제와 임시국회 소집에 맞춰졌다. 나는 이 자리에서 무조건 국회를 열고 보자는 말부터 꺼냈다.
“이런 중요한 때에 국회를 소집하는 데 서로가 조건을 붙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니, 오늘 이 자리에서 국회 소집의 원에 무조건 합의합시다. 그리고 이렇게 국민을 격분시키는 일들이 터지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개헌 작업에 진척이 없기 때문이니 이번 국회에서는 인권 문제는 물론, 개헌 문제도 집중적으로 토의하는 게 좋겠습니다.”
한창 몰리는 입장이었던 민정당 노태우 대표는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말을 삼간 채 개헌 문제만 얘기했다.
“헌특위가 구성된 지 7개월이 지났는데도 아직 개헌안조차 심의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번 임시국회에서는 반드시 개헌특위를 정상화시켜 개헌 문제부터 진지하게 논의하기로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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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당 대표회담에 앞서 / 당시 노태우 민정당 대표, 이민우 신민당 총재와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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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신민당의 이민우 총재는 인권 유린 사태에 초점을 맞췄다.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한 데다 복지원에서도 엄청난 인권 유린 사태가 발생했으니, 이번 임시국회에서는 인권 문제만을 의제로 하여 소집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국정조사권을 발동해 고문의 실상을 공개하고, 상설 인권특위를 설치할 것을 제의하는 바입니다.”
3당의 생각은 이렇듯 달랐다. 신민당은 인권 문제를, 민정당은 헌특위 문제를, 그리고 나는 둘 다를 의제로 내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워낙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3당 대표들은 합의점을 찾아야 했다. 3시간 동안 광범위한 논의를 한 끝에 4개 항에 합의했다.
첫째, 국민 여망에 부응키 위해 정국 운영에 최선을 다한다.
둘째, 국회 개헌특위를 조기에 정상 가동토록 노력한다.
셋째, 고문과 복지원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공동 노력한다.
넷째, 임시국회를 빠른 시일 내에 소집한다.
2월 23일에는 국민당 제4차 정기 전당대회가 열렸다. 나는 경합 없이 만장일치로 다시 총재로 추대됐다. 그리고 취임사에서 합의 개헌과 대통령 직선제를 재천명했다.
“모든 불행한 현실들은 현 정권의 독재화와 정치 세력들의 무분별한 정권욕 때문에 빚어진 결과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통령 직선제로의 합의 개헌이야말로 이 시대를 사는 절대다수 국민의 열망이자, 이 나라 민주화를 위한 첩경인 것입니다……. 나는 정치 세력 간에 엇갈린 이해관계가 하루 리 조정되면서, 여야가 허심탄회하게 정국 전반을 논의할 수 있는 대화의 장이 마련되기를 원하는 바입니다. 아울러 빠른 시일 내에 민주화와 정치 일정을 합의하기 위한 청와대, 여야 정치 지도자 회담을 정식으로 제안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2월 초 3당 대표회담에서 합의하고, 또한 2월 말 총재 취임식에서 강력하게 정국 안정을 위한 방안을 내놓았건만 여야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여전히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열기로 합의한 국회는 여전히 열리지 않았기에 개헌은 물론이거니와 인권 문제 역시 다룰 수 없는 상태였다. 게다가 민정당과 신민당은 그 책임을 서로 상대방에게 미루기만 해 당시 여당에서는 ‘개헌에 관한 중대 결단’ 소문까지 나돌던 실정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호헌’으로 되돌아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