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_3] 어쩌면 여야의 승패를 ...

운명적 선택의 기로에서 박 의장과 단독회견

그 후 2년 동안 군사정권과의 갈등과 긴장 관계가 계속되던 《동아일보》의 이만섭 기자가 1963년의 대통령 선거전에서, 돌연 박정희 후보의 유세반에 뛰어들어 찬조 연사로 활동하게 됐다는 충격적인 뉴스가 전해지자, 정국에 엄청난 파문이 번져갔다.

그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이만섭의 변신은, 그 이면에 협박설과 매수설 등 근거 없는 소문이 무성했고, 당시 각계 저명인사들의 영입으로 군사정부 수뇌부의 간청에 못 이겨 정계 입문을 겴미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떠돌기도 했다. 그런데 이 회고록에서는 그는, 왜 그리고 어떻게 그처럼 치열했던 반군사정부에 대한 저항적 태도를 청산하고, 공화당에 입당하게 되었는가를 4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자세하고 솔직하게 밝혔다.

그 전후 사정 이야기는 이 책 127쪽의 <‘민정 불참’이 ‘민정 참여’로 바뀐 역사적 순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어느 신문, 어느 방송 기자도 박정희 의장과의 단독회견을 실현한 적이 없어, 《동아일보》는 주저하는 이만섭 기자에게 어떻게 해서든 박 의장과의 첫 단독회견을 성사시키도록 강력히 지시했다. 이 기자는 매일같이 박 의장의 스케줄을 면밀히 검토하며 기회를 노리다가, 마침 박 의장의 울릉도 현지 시찰에 잠입할 수 있었지만, 단독회견은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귀경열차 안에서 요행히도 단독회견에 성공했고, 현안에 관한 문답뿐만 아니라, 어쩌면 녹록치 않은 악연 과계에 있던 두 사람은 국가적 현실과 장래에 대한 흉금을 털어놓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인간적인 그리고 국가와 민족의 장래에 관한 상호 교감을 하게 됨으로써 그동안의 박 의장과 군사정부에 대한 회의나 반감 대신 신뢰와 인간적 매력으로 다가서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회상한다.

그 단독회견 후 ‘민정 불참, 원대 복귀’ 라는 박 의장의 기존 공약이 ‘민정 참여’ 쪽으로 가닥을 잡아간 민기식(閔耭植) 제1군 사령관과 이 기자의 단독회견 기사, 그 기사 때문에 다시 구속될 위기에 몰리면, 이만섭 기자가 박 의장의 의중을 탐색하는 기회를 만나 박 의장과 가까워졌고, 박 의장이 전역과 대통령 출마를 결의하기까지 이 기자가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이면사가 이 책에서 처음으로 공개되어 여간 흥미롭지 않다.

그 당시 정국은 민정당의 윤보선 후보와 민주당의 허정 후보 대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와의 삼파전이 진행되다가 열세가 뚜렷해진 허정 후보가 사퇴함으로써, 선거는 박 · 윤의 양자 대결로 압축됐었다. 그 엄숙한 역사적 선택의 갈림길에서 이 기자는 이런 결의를 하기에 이르렀고, 그 때의 심경을 이렇게 회상했다.

― 이때 나는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됐다. 신문기자 이전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누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 나라와 국민을 위하는 길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서민의 사정을 모르는 귀족 출신인 윤보선 전 대통령보다는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농촌과 서민의 고통을 잘 아는 박정희 후보에게 마음이 쏠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여야의 승패를 바꿔놓았을지 모를 대선의 갈림길

한번 결심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이만섭 기자가 곧바로 박정희 후보와 면담하고 자신의 결심을 밝히자, 박 후보는 크게 감동하며 이만섭과 굳은 악수를 나누었다. 그는 바로 박 후보 유세반의 일원이 되어, 함께 전국 방방곡곡 순회하며 목이 터지도록 박 후보의 당선을 유권자들에게 호소했다.

선거 결과, 10여만 표라는 근소한 차로 박 후보의 당선이 확정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야당의 본산이라고 알려졌던 《동아일보》의 거물 기자 이만섭의 선거 유세는 박 의장에게 최소한 10만 표 정도는 더 얻게 했을 것이라고 짐작하게 했다. 그래서 이만섭의 헌신적인 유세 활동은 박 후보의 당선에 매우 큰 공적을 세웠다는 평가가 당시 언론계에는 물론 박 의장 주변에도 파다했다.

이때 평소 야당 지지에 앞장선 《동아일보》의 입장에서만이 아닌, 개인적으로 잘 알고 지낸 윤보선 후보를 멀리하고, 박정희 후보의 집권과 제3공화국의 탄생, 그리고 그 발전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은 언제 생각해도 옳은 선택이었다고 그는 강조한다.

▲ 1963년 박정희, 윤보선 후보 간의 대결을 실은 동아일보 대통령 선거 호외

그 당시만 해도 《동아일보》는 윤 후보를 적극 지지했고, 투표 전야에 박정희 후보의 건국 초기 좌익 전력을 폭로하는 호외를 비밀리에 인쇄하여, 수십만 장이나 전국에 뿌렸다.

그런《동아일보》에 몸을 담고 있던 그가, 투표 결과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백중지세에 있던 두 후보 중에서, 그동안 그를 생지옥 같은 육군형무소에 처넣기도 하고, 인간적인 신뢰 관계도 희미했던 박정희 후보를 선택했다는 것은, 앞서 인용한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를 다시 연상케 한다. 일반적인 상식을 지닌 보통 사람이라면 애써 피해 갔을 그런 길을 확고한 신념에 따라 그는 주저 없이 선택했던 것이다.

이때 이만섭은 특히, 윤보선 후보가 미국의 대외 원조정책이 일대 전환기를 맞아 그 동안의 미국 원조로 살아가던 약소국가들이, 앞으로는 자립경제 체제가 아니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게 된 국제정세를 무시하고, 그 자신이 당선되면 바로 미국에 가서 많은 경제 원조를 받아와 국민을 잘살게 하겠다는 공약을 되풀이하는 데에 돌이킬 수 없는 실망을 하게 됐다고 말한다.

그 당시 남한의 국민소득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수준인 80억 달러에 불과했고, 북한이 그 몇 곱절의 경제력을 보유하면서 수출고는 3억 달러인 데 비해서, 남한은 그 15분의 1에 불과한 2000만 달러의 한심한 실적이었음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윤 호보의 미국 원조 확대요청 공약을 가리켜 박 후보는 민족의 자존심을 파는 ‘구걸외교’라고 비난하며, 그 실효성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망상이라고 비판했다. 윤 후보의 부질없는 공약과 달리, 수출 진흥과 공업 입국으로 자립 경제와 자주국방을 확립하지 않고는 우리의 미래가 없다는 자신에 찬 박 후보의 공약에 공감하게 되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이만섭은 회고한다.

그처럼 박 정권의 출범에 큰 기 기여를 한 이만섭에 대해서 박 대통령은, 아직 30대 초반의 정치적 경륜을 따지기에는 젊은 나이인데도 그의 식견을 매우 높이 평가하여, 그가 당직이나 직위 서열로 봐서는 대통령이 주재하는 원내의 대책회의나 중요 정책회의에 얼씬도 못할 처지임에도, 중요 회의에 이만섭을 자주 참석하게 했고, 원내 부총무 자리를 부여하는 배려도 아끼지 않았다.

그 때문에 젊은 이만섭은 박 대통령을 둘러싼 고위 당료들로부터 질시의 대상이 되었고, 그에 대한 박 대통령의 신임과 총애가 각별한 나머지, 한때 박 대통령이 내심 이만섭을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소문까지 나돌기도 했었다.

만약 그가 한국 정계의 풍속도에 따라 박 대통령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환심을 사는 데 힘썼더라면, 내심 꿈꾸고 있던 대통령으로 가는 길에 근접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자신도 그런 사실을 몰랐을 까닭이 없다. 그러나 소신대로 말할 줄 밖에 모르고, 자신의 확고한 신념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행동하는 이만섭은 성격적으로 권력자의 비위를 맞추는 데 급급한 ‘예스맨’이 될 수가 없었다.

이 책에 상세히 기록된 것처럼, 박 대통령의 3선 개헌 저지투쟁에 이만섭이 앞장서자 박 대통령의 분노를 자아내고, 제1급 ‘괘씸죄’의 대산이 되고 말았다. 그는 가까스로 제10대 국회에 등원했지만, 이미 민심을 여당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여당이 야당보다 1.1% 부족하게 득표한 사실을 지적하여, 민심 이반을 막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그 같은 이만섭 의원의 우국충정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박 대통령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관계가 멀어지고 냉각된 채로, 10 · 26의 비극을 맞게 되었다. 자신의 영달은 언제나 뒷전에 돌리고, 국가와 민족의 이익 앞에서 할 말과 해야 할 행동은 자신에게 어떤 불이익이 닥쳐와도 하고야 마는 것이 이만섭의 불치의 고질병 같은 성격의 한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