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의장직을 그만둔 뒤에도 국익을 위한 외교 활동에 많은 열정을 쏟았다.
2003년 8월 31일부터 9월 4일 사이에 필리핀 마닐라에서 개최된 '평화를 위한 아시아의회연합(AAPP)' 제4차 총회에도 한국대표단 단장으로 참석하여 기조연설을 하고 우방궈[吳邦國] 중국 전인대 상무위원장을 비롯한 각국 의회 지도자들과 만나 북 핵 문제 등에 대해 진솔하고도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중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아시아 · 중동지역 29개국이 참여한 AAPP 제4차 총회에서 나는 기조연설을 통해 “북 핵 문제는 근본적으로 민족 문제이며 남북한이 바로 당사자이므로 북한은 남한을 제외하고 미국하고만 해결하려는 태도를 지양하고 남한과도 성의 있는 논의를 해야 할 것”임을 역설했다. 또한 “핵 문제뿐만 아니라 경제 협력 등 모든 남북문제는 투명하고 공개적으로 진행되어야 하며, 특히 개방 사회인 남한에서는 국민의 지지와 여야의 합의가 필요하므로 국민의 대표기관인 남북 국회회담을 개최할 것”을 제의했다.
또한 우방궈 상무위원장 일행과도 북한 핵 문제 등에 대해 허심탄회하고도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우방궈 상무위원장 오늘 이렇게 중국의 오랜 친구 국가인 한국의 이만섭 전 의장님과 대표단을 이곳 필리핀 마닐라에서 만나 뵙게 되어 더욱 반갑습니다. 그동안 한 · 중 관계 증진을 위해 기여해 오신 것을 치하하며, 여러분을 맞이하는 제 마음이 매우 편안하다는 말씀도 아울러 드립니다.
이만섭 전 의장 저도 형제를 만난 듯이 마음이 편안합니다. 오늘 오전 회의에서 우방궈 위원장님의 연설을 매우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연설에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 각국이 이 지역의 안보, 번영, 평화의 정착을 위해 공동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데 공감합니다.
특히 이 자리에서 왕이[王毅] 외교부장관을 함께 뵙게 되니 더없이 반갑습니다. 최근 6자 회담 기간 중 한국 방송매체를 통해 왕이 부부장께서 회의를 주재하시며 당사자 간 입장 조율에 큰 역할을 하시는 모습을 자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인물이 미남이신 만큼 회담도 좋은 결실을 거두리라고 처음부터 믿고 있었습니다(웃음). 왕이 부부장 6자 회담 등 한반도 평화를 위한 중국의 노력은 우방궈 위원장님의 영도력 하에 추진된 것입니다.
이만섭 전 의장 중국이 6자 회담이 성사되도록 장을 마련해 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북 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의 길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멉니다. 본인이 오늘 연설에서도 지적했듯이 저는 피를 나눈 형제로서 북한의 인민이 더 잘살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를 위해서는 북한이 중국의 정책을 본떠 개방과 개혁을 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아무쪼록 위원장을 위시한 중국의 지도자들이 북한을 이러한 방향으로 설득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실은 이번 AAPP 총회에 북한 대표단이 참석했다면 본인도 직접 대북 설득 노력을 기울일 생각이었으나 북한 대표의 불참으로 그럴 수 없음을 안타깝게 여깁니다. 위원장께서 김정일, 김영남, 최태복 등 북한의 지도자들을 설득시켜 주시기를 다시 한 번 부탁합니다.
우방궈 상무위원장 동 사안에 대한 귀하의 입장을 경청할 수 있어 오히려 기쁘게 생각합니다. 지난 7월 노 대통령의 국빈 방중시 베이징에서 가진 후진타오 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 간에는 매우 건설적인 대화가 오갔으며, 이를 계기로 양국 관계가 ‘전면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격상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양국 간 교역 규모도 한층 더 증대되리라고 예상합니다.
이만섭 전 의장 중국, 미국, 러시아, 일본 등 한반도 주변국이 모두 한반도의 평화 정착을 희망하고 있으나, 그중에서도 중국의 평화에 대한 여망이 가장 절실하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우방궈 상무위원장님께서 북한을 방문하시면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김정일 위원장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어주시기 바랍니다.
우방궈 상무위원장 양자 관계에 대하여 한 가지 덧붙이자면, 중국은 한국과의 관계를 대단히 중시한다는 점입니다. 내일로 예정된 본인의 방한이 이에 대한 방증이기도 합니다. 7월 노 대통령 방중시 본인과의 회담 때 못다 한 이야기는 제가 한국에 가서 계속 이어가기로 하겠습니다.
중국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북 핵 문제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갖고 있으며, 이는 전 세계가 귀추를 주목하고 있는 사안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왕이 부부장도 6자 회담에서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중국은 북핵 문제에 대해 다음 네 가지로 요약되는 입장을 일관되게 견지해 왔습니다. 첫째, 한반도에 평화와 안정을 정착시킨다. 둘째, 한반도 비핵화를 추구한다. 셋째, 동 문제는 평화적 방법으로 해소한다. 넷째, 북한의 안보 우려를 해소시켜 준다. 이 모든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중재와 협상을 통해 평화를 이룩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6자 회담이 이러한 측면에서 성과가 있었기를 바랍니다. 지난 4월의 3자 회담이 일종의 ‘서막(icebreaker)'이었다면 6자 회담은 그 연장선상에서 보다 실질적인 대화를 이어나간 자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취재한 각국 언론의 대체적인 중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평화적인 방법으로 북 핵 문제를 해소해야 한다. 둘째, 이를 위한 방법으로 6자 회담과 같은 다자간 대화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기여했다는 측면에서 이번 6자 회담은 성과가 있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과의 회담 당시 본인은 노 대통령에게 미 · 북간 기본적 신뢰가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은 부시 대통령을, 부시 대통령은 김정일 위원장을 불신합니다. 이 때문에 이번 6자 회담에서도 당사자 간 이견과 갈등이 빚어졌습니다. 그러나 6자 모두가 동의한 사실은, 이 문제가 오랫동안 누적되어 온 사안인 만큼 한두 번의 회담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만큼 앞으로 기나긴 과정이 남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번 6자 회담은 평화적 문제 해결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6자 회담에서 중국에 협조, 지지해 준 한국 측에도 감사드립니다. 한국은 북한과 한 민족인 데다 미국과도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만큼 북 핵 문제의 핵심인 북 · 미 관계에서 양자 모두와 대화가 가능하다는 면에서 한국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6자 회담에서도 한 · 중 협력의 중요성을 인식, 왕이 부부장이 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압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본인을 수행, 마닐라 및 한국 방문길에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입니다(웃음).
이만섭 전 의장 말씀하신 대로 북 · 미간 대화에 진전이 없는 이유는 바로 상호 불신 때문입니다. 이를 중재하기에 가장 좋은 위치에 있는 국가가 바로 중국입니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도 양측을 모두 설득하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기울여주시기 바랍니다.
장쩌민 국가중앙군사위 주석, 리펑 전 상무위원장, 주룽지[朱镕基] 전총리, 리루이환[李瑞環] 전 정협 주석에게 본인의 안부를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방궈 상무위원장 이 의장님 말씀대로 안부를 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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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년 1월 10일 리펑(李鵬) 중국 전인대 상무위원장에게 축구공인 피버노바를 선물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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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나는 2004년 1월 25일부터 1월 31일까지 알제리, 튀니지 국회의장의 초청으로 양국을 공식 방문했다.
알제리(1월 25일~28일)에서는 카림 유네스(Karim Younes) 국회의장과 압델아지즈 벨카뎀(Abdelaziz Belkhadem) 외무장관, 튀니지(1월 29일~31일)에서는 푸아드 메바자(Fouad Mebazzaa) 국회의장과 모하메드 가누치(Mahamed Ghannouchi) 총리, 사이다 스티위(Saida Chtioui) 사무총장 등을 만나 양국 간의 우호 증진과 경제협력 강화, 북 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 방안 등에 관해 깊이 있는 의견을 나눴다.
특히 나는 양국 지도자들에게 우리나라는 모든 아랍권 국가들과 우호 관계 증진을 희망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번 우리나라의 이라크 파병부대는 전후 복구를 위해 공병대와 의무대가 중심이 되어 있음을 알려주었다.
이 방문에는 잊을 수 없는 일은 알제리의 카림 유네스 국회의장이 내가 도착할 때와 떠날 때 두 번이나 직접 공항에 나오고 나를 ‘형님’이라 부르며 너무나 고맙게 환대해 준 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