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 정치풍토와 이만섭의 정치인생 50년
임홍빈(任洪彬 · 언론인) / 《한국일보》논설위원, 《경향신문》논설주간, KBS 한국방송공사 이사 역임, 현 월간 《문학사상》편집고문.
‘권불십년’의 단명短命이 일반화된 정가에 50년 장수 기록
예로부터 “열흘 넘기는 꽃이 없고, 10년을 지탱하는 권세가 없다(花無十一紅 權不十年)”고 한다. 다른 나라의 경우도 크게 다를 바 없겠지만, 특히 한국이라는, 모든 일이 극단으로 치닫기 쉬운 특이한 정치 풍토에서 이만섭처럼 근 50년이나 장수를 누리는 정치인은 그리 흔치 않다.
그 까닭은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정당들이 아직도 전근대적인 붕당성(朋黨性)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수백 년 전 조선 시대의 정치형태와 근본적인 차이를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한 정당에서 옛날의 왕이 쥐고 있던 생사여탈의 권력은, 여당의 경우는 대통령, 야당의 경우는 총재와 같은 자리에서 군림하는 사람이 독점하기 마련이다.
이념이나 신념으로 뭉친 근대적인 정당이 아닌, 인맥이나 이해관계로 뭉친 붕당적 조직의 틀 속으로 들어가면, 흔히 당내 민주주의는 허울 좋은 장식품에 지나지 않고, 한 보스를 정점으로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위계질서가 성립되어, 그 테두리 밖으로 밀려나면 정치생명을 부지하기 어렵다.
여야 정당은 격렬한 대립과 갈등이 지속적으로 전개된다고 해도, 목적과 가치관 같은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공통(共通)의 교감성(交感性)을 공유하고 있다면, 설득과 타협이라는 민주정치의 기본 틀은 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정당의 여야 관계는 근본적으로 ‘적과 동지’의 관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현실 정치의 타성으로, 툭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극한투쟁(極限鬪爭)’이 빚어지기 일쑤이고, 이 과정에서 약골의 정치인은 당 지도부에 의한 스케이프고트로 희생을 당하거나, 상대 당의 집중포화를 맞고 도태당하기도 한다.
그처럼 척박한 한국의 정치풍토에서는 민주주의의 미덕이라는 관용성(寬容性)도 희박해서, 걸핏하면 삶이냐 죽음이냐의 막다른 절벽에 몰리기 쉽다. 조선왕조 시대에 정치적 패배자가 당했던, 삼족(三族)을 멸하는 가혹하기 이를 데 없는 정치적 보복은, 중국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부관참시(剖棺斬屍)라고 하는, 분묘 속의 시신을 파내어 칼질하는 옛날의 잔학한 형벌도 조선 시대에 흔히 볼 수 있던 제도이다. 요즘 몇 십 년 전 과거사를 파헤치며 죽은 망령들을 심판한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현대판 부관참시라고 볼 만하다.
중국에 “시신(屍身)에는 매질하지 않는다”라는 격언이 전해지는 것을 보면, 아마도 부관참시란 한국인이 선호하는 잔인한 형벌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자고로 한국이 중국의 문화에 큰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원한을 푼다든가 원수를 갚는다든가 하는 보복이나 앙갚음은 예나 이제나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싱가포르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리콴유[李光耀]가, 그의 자서전 《내가 걸어온 일류국가의 길》에서 <기로에 선 한국>이라는 한 장(章)을 붙여, 한국의 새로운 집권자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만델라 대통령처럼 ‘진실과 화해위원회’를 통해서 관용과 화해를 실현하지 못하고, 전직 대통령까지 감옥에 보냄으로써, 국가지도자에 대한 국민적 멸시와 환멸을 초래하게 되었으며, 어떤 지도자가 등장해도 같은 대접을 받게 되는 부작용의 악순환이 가시려면 앞으로 오랜 세월이 걸릴 것이라고 충고한 사실에서, 우리는 교훈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폐습적인 보복정치의 풍토는 정치생명의 단명화(短命化)를 재촉하는 한국 정치의 가장 일그러진 단면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 정치의 부정적 타성을 거부한 가장 비한국적 정치인
그 같은 가혹한 정치풍토에서 국회의원 8선에 국회의장을 두 번이나 역임한 이만섭이, 질풍노도의 시대라는 이승만, 장면, 운보선, 박정희, 최구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시대를 관통하여 노무현 대통령에 이르는 근 50년의 최장수 정치인생에 종지부를 찍고, 헌정 사상 초유의 일로, 여야 의원들의 기립 박수와 환송을 받으며 국회 본회의장을 떠난 것은, 좀처럼 보기 드문 흐뭇한 한 정경으로 기록될 만하다.
거칠고 삭막한 한국 정가에서 이만섭은, 어떻게 그 반세기에 걸친 정치인생을 통하여, 어떤 스캔들이나 의혹사건에 휘말리는 것 같은 상처 한 번 입은 적 없이 숱한 정치적 공든 탑을 쌓아올리고, 마침내 국회가 대통령이 이끄는 ‘행정부의 시녀’라는 오욕의 굴레를 벗어던지게 했으며, 입법부의 독립성을 확립시켜 고질적 병폐인 ‘날치기’를 추방했고, 의장의 당적(黨籍) 이탈을 법제화하는 등 60년 헌정 사상 초유의 쾌거를 이룩할 수 있었을까.
현실 정치에 순응하는 전형적인 정치인이 아니고, 오히려 가장 비한국적인 정치인으로서, 누구 앞에서나 바른 말을 서슴지 않고, 박 대통령의 3선 개헌 저지 투쟁 같은, 가히 목숨을 건 반항아적인 행동까지 서슴지 않은 그가, 어떻게 반세기의 기나긴 정치 생황을 보람차고 화려하게 누릴 수 있었는지, 어찌 보면 참으로 기적 같은 느낌마저 든다.
한말韓末의 지사志士와 같은 우국열정의 기자였던 이만섭
그와 나는 20대 중반의 홍안 청년이었던 1956년에, 신문기자의 길로 들어선 이후 수년 동안 함께 국회의사당과 정가를 누비며, 몰락의 길을 재촉하던 자유당과 그에 맞선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사활을 건 민주투쟁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만섭 기자는 보도기자의 한계를 넘어서, 곧잘 의분을 참지 못하고 야당의원들과 동조하는 언동을 하다가, 정치깡패의 폭력 세례를 받기도 하고, 경찰에 쫓기는 몸이 되기도 했었다.
그래서 나는 그 같은 이 기자의 성격에 비추어 그의 기자 생활이 오래가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었다. 5 · 16쿠데타 이후 군사정부가 허위 보도를 했다는 트집을 잡아, 3개월간이나 육군형무소에서 고초를 겪기도 했던 그가, 돌연 공화당에 입당해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후보의 유세반에 참가했을 때의 느낌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도 이만섭이 저런 정치활동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하고 걱정하며, 그의 직언하는 습성과 물불을 가리지 않는 정의감에 발로 때문에, 그가 정계에 오래 머물 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이 앞섰다.
그런 이만섭이 반세기가 넘는 동안 정권이 여섯 번이나 바뀌었어도, 항상 그 시대적 변화에 따라 여러 실력자로부터 탁월한 정치적 역량과 명석한 경륜을 높이 평가받았으며, 그만이 할 수 있는 시대적 사명을 다하려고 진력했던 것이다. 그는 항상 최선이 아니면 차선(次善)의 길을 택했고, 떳떳치 못한 야합의 길을 피했으며, 올바르고도 독보적인, 의로운 길을 택했다. 역대 권력자는 그를 정치고문처럼 모셔 갔고 국가와 민족을 위한 길에 동참하기를 호소했다고 알려져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