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프로스트의 명시에 담긴, 남들이 애써 피해 가는 길을……
나는 이만섭을 생각할 때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3대 명시의 하나라고 하는 <가지 못한 길>의 한 구절을 떠올리곤 한다.
숲 속의 길은 두 갈래로 나 있었고
나는 사람들이 별로 밟지 않은 길을 택했다
그 길을 택함으로써 모든 건 엄청나게 달라졌고 내 운명도 바뀌고 말았다
미국의 국민적 시인이라는 영예를 안고, 케네디 대통령 취임식에서 자작시를 낭송하기도 한 프로스트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는 말을 시 속에 담아 깊은 상념이 담긴 숱한 명시를 남겼다.
인생의 여러 운명적인 선택의 단계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이 밟고 간, 보다 편하고 안전한 길을 택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만섭의 운명적 선택은 그렇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한 지 한 달 만에 6 · 25전쟁이 터지자, 배움의 길을 버리고 공군사관학교에 3기생으로 입학했는데, 졸업을 앞둔 시점에서 생도들 사이에 패싸움이 벌어져, 많은 부상자를 낳게 한 불상사가 발생했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직접 관련자라고 해도 책임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 일반적 현상인데, 이 싸움에 가담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친목단체인 오성회의 회장이며 생도 대장이라는 입장에서, 예닐곱 명이 중벌을 받게 하는 대신 자기 혼자 벌을 받겠다고 간청한 끝에, 구속되어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판결이 내려지기 전, 당시 최용덕(崔用德) 공군참모총장은 감방에 있던 이만섭을 불러 그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용기를 치하하면서, “이 군 같은 성격은 비행기를 타면 죽네. 그러니 대학으로 돌아가서 공부하는 게 좋겠어”라고 위로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퇴교 조치를 당한 그를 생애 최초로 좌절의 고통 속에 빠져 들었지만, 그건 그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다.
나는 1956년 가을, 거의 같은 시기에 이만섭과 신문기자 생활을 시작, 국회 기자실에서 그를 처음 만난 인연으로 근 50년의 친교를 맺고 있어 그를 잘 알고 있지만, 그의 명석한 두뇌와 순수한 애국열정,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행동력을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자유당 말기, 민심을 잃고 몰락의 나락으로 떨어져 들어가는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은 야당 탄압과 부정선거를 자행하고 있었다. 이만섭 기자는, 그와 같은 부정과 불의의 현장에서 취재를 할 때마다 다른 기자들과는 달리 울분을 참지 못했고, 때론 고함을 치며 그들을 규탄하고, 때론 행동으로 저지하는 한말(韓末)의 지사(志士) 같은 기자였다.
여당에 항거하는 투사이자 야당 영수의 정치적 고문 역할
1958년의 영일을구 재선거에서 여당 후보가 야당 측 투표지를 훔쳐가려는 현장을 목격했을 때, 그는 “야, 이 도둑놈들아” 하고 소리치며 개표더미를 두 팔로 덥석 끌어안고 발버둥 치다가 정치 깡패들의 무자비한 주먹세례를 받고 실신한 적도 있다.
2.4파동 당시에는, 농성 중인 야당 국회의원을 끌어내기 위해 전국에서 무술 경찰관들을 갑작스럽게 끌어 모아 국회 경위로 둔갑시키는 현장을 추적하여, 기자로서 포기하기 어려운 ‘특종기사’의 욕심을 버리고 다른 신문사의 기자들에게도 알려주어서 공동으로 취재해 대대적으로 보도케 했다.
4·19혁명 중에 최루탄이 이마에 박혀 죽은 김주열 군의 시체를 경찰이 몰래 처리하려는 음모를 탐지하고,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추적보도 함으로써 당시 꺼져가던 4·19혁명의 불길에 기름을 부어 넣은 결과를 자아냈고, 다시 전국적인 규모의 데모 열풍을 불러일으킨 결정적인 계기를 낳게 한 것도 이만섭 기자였다. 또한 그는 민주당 수뇌부의 두 영수였던 조병옥 박사와 장면 박사의 정치적 고문이요 조언자로서, 그들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받기도 했다.
이 회고록에는, 자유당의 단말마적인 정치탄압이 절정에 달했을 때 이만섭이 장면 부통령에게, 즉시 사임하고 이승만 정권 타도 투쟁을 전개하라고 권고한 이야기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고, 조병옥 박사에게 제4대 민주당 대통령 후보 시절 자유당 정권의 부정 선거 획책과 정치적 탄압에 항거하여, 대통령 후보직을 사퇴하겠다는 성명을 내고 최대한의 경고를 하도록 권유한 감동적인 대목도 기록되어 있다.
특히 조병옥 박사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서 선거전의 와중에 돌연 중병 치료차 미국의 월터리드 육군병원에 입원했을 때, 조 박사가 수술을 끝낸 후 이만섭 기자에게 국제전화를 걸어,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고 곧 귀국하겠다고 전했다는 대목은, 조 후보의 이만섭 기자에 대한 신뢰와 기대가 얼마나 컸던가를 말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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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아일보의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 박사의 급서 호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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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당시 한국의 여론을 좌우하던 가장 강력한 대중매체였던 《동아일보》와 이만섭 기자가 없었다면 4·19혁명 이후, 민주당이 집권하면서 한동안 그에게도 편히 발을 뻗고 자는 시간이 돌아오긴 했지만, 5 · 16의 정변이 빚어진 지 한 달도 채 안 된 시점에서부터 그는 다시금 수난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윤보선(尹潽善) 대통령이 기자회견 중에, 군사정부는 조속히 정권을 민간인에게 이양해야 한다고 말한 사실을 《동아일보》는 1면 톱으로 보도했으나, 다른 신문들은 묵살하거나 제목으로 뽑지 않고 그저 지나가는 말처럼 희석한 내용의 기사로 얼버무렸다. 그러자 군사정부는 이 기자가 윤 대통령이 하지 않은 말을 허위로 보도했다는 올가미를 씌워 그를 구속했다.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어 군사재판을 받게 된 이만섭은, 군정 당국으로부터 기사를 잘못 썼다는 정정기사를 내면 풀어주겠다는 제의가 있었고, 동아일보의 경영진으로부터도 웬만한 선에서 타협하자는 권유를 받았으나, 기자로서의 양심과 사명을 저버리고 불의와 타협하고 안일을 택하느니, 차라리 감옥으로 가는 길을 택하겠다고 단호히 그 제의를 거부했다. 그래서 육군형무소에서의 수감 생활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