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에 걸린 연구원의 수기 (51화)

다음은 연구실에서 한탄바이러스로 실험 중 출혈열에 걸린 유선자 연구원의 병상일지이다.

1982년은 실험실에서 일해 온 지 20년째 되는 해였다. 정월은 마치 1주일의 월요일과 같은 달이어서 마음이 무겁고 긴장되며 엄숙하기도 하고 아무튼 좀 싫은 달이기도 하다.

1962년 2월 3일 서울의대 나세진 학장님으로부터 미생물학교실 연구원 임명장을 받았으니까 꽤 많은 날들이 지난 것만은 사실이다. 나는 몸이 마르고 약해 보이나 건강에는 자신이 있다고 자부해 왔다. 그런데 1월 5일경 심한 감기에 걸려서 편도선염이 시작되었다. 목이 많이 붓고 열이 나므로 이비인후과에서 치료를 받고 링코신과 몇 가지 처방약을 받았다.

2~3일 후에 건강이 좋아졌다. 며칠이 지나 또 감기증세가 나타났다. 항상 바쁜 생활을 하니 쉴 수도 없고 무리하게 계속 연구실에서 일을 했다. 3~4일이 지나도 나아지는 증세는 보이지 않다가 1월 14일 금요일 저녁부터는 더 많은 열이 나며 일어날 수가 없어 토요일 아침에 출근을 못하고 동네에 있는 내과의원에 갔다. 의사는 독감이라며 가나마이신 주사를 놓고 해열제를 주었다.

병원에서 준 처방약도 도무지 듣지를 않았다. 할 수 없이 일요일에 너무 허리가 아파서 과장님께 전화를 드렸다. 증세를 들으시더니 혹시 출혈열이 아닐까 하면서 걱정을 하셨다. 지난 수년간 많은 교실원들이 동물실험실에서 실험을 하다가 여러 명이 출혈열에 걸려 고생한 일이 있었다. 모두가 동물실에서 일을 하거나 그곳 출입자들이었으므로 나는 동물실만 가지 않으면 절대로 출혈열에 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월요일 아침 너무 어지럽고 다리가 후들거려 또 동네 병원에 갔다. 역시 의사는 독감이라고 했다. 이 일을 안 과장님은 즉시 노 기사와 차를 보내, 나를 데리러 왔다. 과장님은 출혈열을 의심하면서도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아닐 것이라고 잡아뗐다.

성인화 선생이 혈청검사를 하고, 과장님은 대학병원 임상병리과에 소변검사를 의뢰했다. 소변검사에서는 약간의 피가 섞여 나왔다. 오후 혈청 검사결과 출혈열 바이러스에 대한 항체가 나오니까 그제서야 링겔 주사를 놓았다. 과장님은 입원하라고 했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었으므로 병원에 입원할 형편은 아니었다. 집에서는 독감인 줄 알고 있었다.

나는 혼자 고민에 빠졌다.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출혈열에 대한 개개인의 후유증 같은 것이 있지나 않나 막연하게 불안감을 갖기 시작했다. 어린애는 이제 겨우 유치원에 원서를 접수한 6살밖에 안 되는 애기인데 엄마가 무서운 병에 걸려 장성하도록 뒷바라지를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닌지?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아픈 종에도 걸을 수가 있어 계속 출근은 하면서 오전에는 대학병원에서 링겔 주사를 맞고 오후에는 또 연구실에서 일을 했다. 과장님은 좀 짓궂은 데가 있다. 연구하는 사람이 병에 걸린 것은 안됐지만 학문적으로는 흥미진진하다는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물론 일에 대한 욕심이 남달리 많으셔서 그러실 것이라고 이해는 하면서도 막상 과장님 가족이 병에 걸렸으면 어떻게 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나며 그 의문은 지금도 나를 쓸쓸하게 한다.

증세는 호전되어 갔고 소변량은 평소보다 배가 늘었다. 물을 많이 먹으라는 과장님 말씀대로 평소 물을 잘 안 마시는 편인데 앉은자리에서 냉수를 한 대접씩 삼키고는 여러 번 토할 뻔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많이 나아졌으며 다른 교실원에 비해 임상증세가 그리 심하지 않았다고 생각이 되지만 감기증세나 혹은 과로를 하게 되면 허리가 아프고 다리에 힘이 빠져서 전에는 등산을 좋아했는데 요즈음은 걷는 것을 싫어하게 되었다.

하지만 병에 걸리고 항체가 생기는 똑같은 종류의 일에 시달리지만 내가 접한 많은 바이러스들에 대한 항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 속에 많이 생겼으리라 생각하니 죽지만 않으면 병에 걸릴 만도 하다고 한편으로는 생각이 든다. 편한 마음으로 일할 수 있게 되고 또 해야 하는 많은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지금부터 약 1개월 전인 작년 12월 중순경부터 쥐의 폐장에서 몇 가지 바이러스를 분리하여 한탄바이러스 항원과 VeroE6세포에서 분리된 한타바이러스들의 검사용 항원슬라이드를 거의 매일 수백 장씩 만들어야 하는 바쁜 생활을 했다. 정월의 날씨는 몹시 춥고 석유난로 하나로 10평 정도의 연구실을 따뜻이 하자니 자연히 차문은 모두 꼭꼭 닫혀 있거나 비닐로 밀폐되어 공기의 소통이 전혀 되지 않은 환경이었고, 또 무균안전실험대가 없으므로 항원검사용 슬라이드를 제작 후 실온에서 건조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실험대 위에서 말리게 되었다.

방 안의 건조한 공기 중에 떠 있던 바이러스가 먼지와 섞여서 나의 호흡기를 통하여 감염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다른 교실원들의 실내감염을 막기 위해 과장님께서는 안전실험대를 급히 사들이셨다.

1982년 1월
유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