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는 자체 힘으로는 증식할 수 없고 생존할 수도 없기 때문에 살아 있는 숙주세포 속에서만 기생하고 생존한다. 흔히 맹독성 바이러스일수록 생존력이 강한 것으로 오인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독성이 강한 바이러스는 숙주가 금방 죽어 자신이 살 곳을 잃게 된다. 에볼라바이러스처럼 치명적인 바이러스보다 감기바이러스처럼 온순한 바이러스가 훨씬 생존력이 강하다는 뜻이다.
바이러스의 또 다른 특성은 바이러스마다 숙주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한탄바이러스는 등줄쥐에서만, 서울바이러스는 집쥐에서만 증식하고 생존한다.
홍역도 마찬가지다. 디스템퍼바이러스라고 불리는 바이러스는 개에게서만 홍역을 일으키고 사람에게는 무해하다.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뇌염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는 개에겐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의문이 남는다. 집쥐라면 몰라도 실험실에서 사육되는 쥐는 대부분 깨끗한 환경에서 자라는데 왜 서울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까. 나는 깨끗한 실험용 흰쥐를 보통 사용하는 쥐틀 속에 넣고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고려대의대 연구실 복도에 놓아 보았다.
석 달이 지나니까 열 마리 중 두 마리가 서울바이러스에 감염됐으며 여섯 달이 지났을 땐 여섯 마리로 늘어났다. 바이러스를 갖고 있는 집쥐가 밤중에 왔다갔다 하다가 실험용 흰쥐에 가까이 가 바이러스를 옮겼다는 얘기다.
이 무렵 나는 학자로서 자긍심을 한껏 누릴 수 있는 일에 관여하게 된다. 일본 여러 대학에서 발생한 괴질의 원인을 내 손으로 규명하고 예방 대책을 세워 준 일이다. 조금 거창하지만 나는 이를 ‘일본열도 구출작전’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1978년 6월, 일본 니가타(新潟)의대 내과의 시바사키(柴崎) 교수로부터 편지가 날아왔다. 같은 병원의 한 의사가 입원했는데 괴상한 임상증상이 나타나 혹시 내가 발견한 유행성출혈열 바이러스 환자가 아닌지 혈청을 검사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두 차례에 걸쳐 환자의 혈청을 보내 왔다. 검사 결과는 양성으로 유행성출혈열 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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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실험동물학회 회장인 가와마다 교수(왼쪽에서 2번째 )가 1981년 일본한국형출혈열 대책반장으로 서울을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 (3번째가 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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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검사결과를 그에게 통보하고 어떤 환자인지 궁금하니 자세한 입원 기록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에게선 아무런 답장도 오지 않았다. 자신의 병원에서 유행성출혈열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병원 이미지가 치명타를 입기 때문에 일부러 쉬쉬했던 모양이다.
그 해 9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국제바이러스학회가 열렸다. 나는 이곳에서 많은 일본인 학자를 만나게 됐다. 그 중 한 명이 일본 센다이(仙台) 시에 있는 토호쿠(東北)대학교 의대 이시다(石田) 학장이었다. 간염박사로 유명한 김정룡 박사와 체격과 외모가 닮아 내 눈에 띈 이시다 학장은 작은 체구였지만 당찬 인물이다.
센다이바이러스를 세계 최초로 발견한 학자인 그는 특유의 카리스마를 지녀 ‘센다이의 도노사마(城主*성주, 영주)’란 별명을 갖고 있을 정도였다.
그는 나를 보자 자신의 대학병원 동물실에서도 내가 학회에서 언급한 증상을 보인 환자들이 많았다며 조사해 줄 것을 요청해 왔다. 저명한 학자다운 당당함이랄까, 이것저것 견주지 않는 솔직함이 마음에 들었다. 놀라운 것은 그의 추진력이었다. 헤이그학회에서 서울로 돌아오기에 앞서 중간 경유지인 토쿄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그런데 다음날 오전 6시쯤 누군가 내 호텔 방문을 두드렸다. 토호쿠의대 전임강사였던 우메나이(梅内) 교수였다. 그는 이시다 학장이 어젯밤 동경에서 전화로 지시하였다면서 냉장고에 보관하고 있던 환자의 혈청을 가지고 밤열차를 타고 새벽에 내가 묵고 있던 토쿄호텔까지 달려온 것이다.
그는 내게 21개의 혈청을 건네 줬다. 한국에 돌아와 검사해 보니 이 중 17개가 한탄바이러스 양성이었다. 유행성출혈열 환자 혈청이었던 것이다. 그 후 환자가 발생한 동물실에 있는 실험용 흰쥐의 혈청을 보내 왔다.
역시 49개 중 9개가 양성으로 나왔다. 알고 봤더니 1975년부터 토호쿠의대 동물실에서만 14명의 의사가 고열과 혈뇨를 동반한 괴질로 병원에 입원했다고 했다.
1978년 10월, 오사카에서 열린 일본 바이러스학회에서 나는 센다이에서 발생한 괴질이 바로 유행성출혈열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그날부터 일본 열도는 출혈열의 공포에 휩싸였으며 모든 신문은 이를 대서특필하였다. 그때 일본 전역에서 괴질이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