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토호쿠의대 병원 동물실의 흰쥐 50마리에서 혈액을 채취해 혈청 검사를 해보니 90%의 동물이 서울바이러스에 감염돼 있었다. 이 때문에 이곳에 있던 실험용 쥐 1천여 마리가 한꺼번에 도살됐다. 일본 언론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지금까지 일본 19개 대학 동물실험실에서 산발적으로 발생했던 괴질이 모두 내 손에 의해 서울바이러스로 밝혀졌다. 1979년 봄 센다이 시에 있는 토호쿠대학에서 열린 유행성출혈열 세미나장에선 일본의 거의 모든 신문사와 방송사 기자들이 필자 곁을 에워싸고 취재 경쟁을 벌였다.
이 때 기억나는 것은 자존심 싸움이었다. 당시 세미나를 주도했던 토호쿠의대 학장인 이시다 교수가 나에게 보낸 초청장에서 유행성출혈열을 당시 학계에서 통용되던 ‘한국형출혈열’ 대신 ‘조선(朝鮮)출혈열’로 명기한 것이 문제였다. 알다시피 조선은 일제 때 사용한 말로 한국이란 정식 국호를 무시한 표현으로 일본인이 한국을 얕잡아 볼 때 흔히 사용한다.
나는 기분이 나빴고 무척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그에게 이를 바로잡아 줄 것을 요구하는 항의편지를 썼다. 다행히 그는 자신의 잘못을 전보로 사과하고 공식용어로 한국형출혈열을 쓰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는 수면 아래 감추어졌던 일본 대학병원 동물실험실의 괴질을 용감하게 처음으로 공개한 학자이다.
이처럼 자신의 치부를 드러낸 이시다 학장의 결단으로 토호쿠의대 괴질이 규명되자 일본의 다른 대학병원과 많은 연구소에서 쉬쉬하며 감췄던 사례들을 공개하기 시작했다. 필자가 당시 일본 내 19개 의대 병원과 연구소에서 의뢰하여 온 수백 명의 환자 혈청을 조사해 보니 1백25명의 출혈열 환자가 확인됐으며 이 중에서 1명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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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호쿠대학병원 동물실험실을 조사하고 있는 필자(왼쪽), 일본실험동물협회장 가와마다 교수(3번째)와 도호쿠의대 교수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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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한 사람은 홋카이도의대 교수로 실험용 흰쥐로부터 유행성출혈열에 감염됐으나 감기쯤으로 가볍게 여긴 것이 화근이었다. 그는 아픈 몸을 이끌고 스키를 탔는데 발병 3일 후 병원에 입원했으나 쇼크에 빠져 10일 간이나 인공호흡기로 연명하다가 결국 사망했다.
그가 사경을 헤맬 때 일본의 출혈열 연구반장인 오사카대학의 카와마타(川又) 교수로부터 나에게 와 달라는 연락이 왔으나 특별한 치료법이 없기 때문에 나는 홋카이도(北海道)에 가지 않았다.
스키를 탔다는 것이 그의 죽음을 결정지은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유행성출혈열에 걸려도 무리하지 않고 집에서 푹 쉬면 며칠 고생하지만 대개 생명은 건질 수 있다. 그러나 과로나 스트레스 등 무리하면 경과가 나빠지고 특히 근육노동을 하면 치명적이다. 장교와 사병의 차이점을 따져 보면 알기 쉽다. 필자는 지금까지 수천 명의 군인 환자를 국군수도통합병원에서 보았는데 대개 사병이 걸리면 죽지 않지만 장교가 걸리면 죽는 것을 많이 목격했다.
시키는 일만 하면 되는 사병이야 몸이 아프면 곧 군의관에게 말하고 쉴 수 있지만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장교는 몸이 아파도 무리하게 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장교는 아주 병세가 심할 때에 병원에 오기 때문에 사망률이 높아지게 된다.
우리 실험실에서 감염된 사람 중에서도 실험을 직접 도맡아 강행군을 해야 하는 연구원들이 훨씬 심하게 앓았다. 고려대 생물학과 출신으로 당시 내 연구를 맡았던 송 모 조교가 대표적 사례다. 그는 유행성출혈열에 감염된 사실을 모르고 처음엔 감기인줄만 알았다.
그는 고열 등 몸살 증세가 나타났지만 우직하게도 실험을 계속했으며 감기라 생각하고 증상이 나타난 지 사흘 뒤에는 결혼까지 했다. 그리고 제주도까지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그는 죽다 살아났지만 덕분에 당시까지 베일에 감춰져 왔던 의문점 한 가지를 풀었다. 완쾌 후 그의 혈청에선 항체 양성반응이 나왔지만 그의 처는 음성반응이 나왔다.
아내라면 환자와 가장 가깝게 생활하는 사람이 아닌가. 더구나 그의 처는 송조교가 유행성출혈열인지 모른 채 신부로 신랑을 대했을 것이다. 이는 유행성출혈열이 사람에서 사람으로 감염되진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특히 키스나 성교를 통해서도 바이러스가 전염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송조교가 인체실험으로 입증한 것이다.
그는 현재 학문의 꿈을 접고 미국 텍사스에서 세탁업으로 성공하여 잘살고 있다. 특유의 성실성 덕에 세 개 이상의 세탁 체인을 운영하는 어엿한 사장이 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