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받은 검사비 (55회)

1979년 센다이 시에 있는 토호쿠대학 의과대학에서 열린 유행성출혈열의 보균 동물과 감염 경로에 대한 특별강연을 한 필자는 그날 저녁 파티에서 낯선 두 명의 일본인을 만났다.

일본실험동물협회 타카기(高木) 회장 일행이었다. 이 협회는 일본 내 대학과 연구소 및 제약회사 등 각종 동물실에 실험용 동물을 공급하는 1백여 개 회사를 대표하는 협의단체로 타카기 회장은 나에게 긴급협조 요청을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그들은 당시 매우 난처한 입장에 있었다.

동물을 사용하는 실험실에서 발생한 괴질이 서울바이러스에 감염된 쥐 때문인 것으로 밝혀지면서 쥐를 공급하는 회사가 몽땅 손해배상 책임을 지게 될 판이었다. 그들은 내게 당시 일본에서 사육중인 실험용 동물과 쥐의 감염 상태를 혈청검사로 면밀하게 조사해줄 것을 부탁해 왔다. 나는 연구자의 안전을 위해 협조할 수 있다고 답했다.

그해 여름 타카기 회장은 오사카대학 미생물병연구소장이자 일본실험동물학회장인 카와마타 교수와 함께 나의 사무실로 나를 찾아왔다. 구체적으로 연구 협정을 체결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일본에 있는 1백여 개 실험동물공급회사 중 규모가 큰 60여 개가 참여할 예정이며 이곳에서 모두 6천여 개의 동물과 쥐 혈청을 보내겠으니 한탄바이러스 대항 항체를 검사해 달라고 했다. 6천 개라면 어마어마한 양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우리 실험실 규모로는 한 사람이 2년은 꼬박 걸려야 하는 작업이었다.

물론 공짜는 곤란했다. 그렇다면 검사료를 얼마나 제시해야 할까. 사업엔 문외한인데다 대학교수가 돈을 받고 검사해 준 일도 없으며 더욱이 이런 계약을 체결해 본 일이 없어 어찌해야 좋을지 몹시 곤란했다.

이때 내게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 이가 현재 법의학의 태두로 평가받는 학술원 회원 문국진 교수였다. 그는 나의 서울대의대 1년 후배로 당시엔 법의학이 아니라 고려대의대 병리학교실 주임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그의 사무실은 바로 내 사무실의 옆방이었다. 일본에서 거물들이 나를 찾아오자 나는 젊은 조교들만 있는 우리 교실을 소개하기 부끄러워 문 교수를 끌어들였다.

▲ 1980년 육군통합병원 유행성출혈열환자 병실을 찾은 일본 문부성 파견 출혈열연구소팀(오른쪽 3번째가 필자)

문 교수는 지금도 그렇지만 엄청난 거구이며 풍채가 좋고 위풍당당해 누가 봐도 거물급으로 보였다. 나는 그를 우리 연구소의 바이러스 검사부의 총책임자라고 둘러댔다. 그들에게 우리 연구소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내게 검사 대가로 얼마를 원하느냐고 물어 왔다. 나는 속으로 천만 엔 정도면 인건비와 재료비를 충당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랬더니 웬걸, 문교수가 느긋한 목소리로 인건비, 재료비와 수수료를 합쳐 2천만 엔은 내야 한다고 나서는 것이 아닌가. 이 사람이 무슨 배짱인가 싶었다.

놀랍게도 그 말을 들은 일본팀은 아무 이의 없이 즉석에서 동의하고 바로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20여 년 전의 일본 돈 2천만 엔은 당시로선 매우 큰돈이었다. 문 교수 덕분에 예상보다 2배나 많은 금액을 따낼 수 있었던 필자는 그 후 문 교수에게 여러 차례 술을 사야 했고 지금은 학술원 회장으로 친하게 지내고 있다.

그이 생각이 옳았다는 것을 후에야 깨달았다. 검사료 외에 위험수당과 수수료가 따라야 하는 것을 그때 나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 벌어들인 일본 돈으로 입체현미경과 형광현미경, 그리고 검사에 필요한 재료와 시약 구입에 요긴하게 썼다. 많은 시약들을 일본에서 구입해야 했다. 사실 검사에 협조한 다른 연구원의 인건비를 합치면 더 큰 수입이 되진 않았지만 일본 사람의 돈으로 검사해 준다는 데 더 큰 매력이 있었다.

학문의 세계에서도 때론 배포가 큰 사업가적 기질이 필요하다는 점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일본 사람들의 철저함이었다. 타카기 회장은 비행기를 타고 나를 10여 차례에 걸쳐 직접 찾아왔다. 올 때마다 2~3백 개 이상의 동물혈청을 드라이아이스 함에 넣어 가지고 왔는데 한 번도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내거나 소포와 같은 우편물을 이용하지 않았다. 내가 작성한 검사 결과도 항상 자기가 직접 챙겼다.

그는 나에게 결과는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 달라고 당부했다. 조사 결과가 새 나가면 바이러스 양성이 나온 회사는 바로 망하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당시 내가 검사했던 일본 내 60여 개 실험동물회사 중 35개 회사에서 양성동물이 나왔다. 그들은 몰래 감염된 쥐가 있는 동물회사의 모든 쥐를 도살했음은 물론이다.

1980년 여름, 일본 문부성은 오사카대학 카와마타 교수를 단장으로 유행성출혈열 연구반을 만들어 서울에 있는 내 연구실로 파견했다. 그들은 토호쿠의대 우메나이 교수 등 일본의 6개 대학과 국립보건원의 신진 미생물학자 12명이었다. 후진국 한국에서도 꼭 배워야 할 것은 신속하게 배우자는 태도였고, 무엇보다 일본열도를 괴질에서 속히 구해야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