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난 곳은 경기도 안성군 고삼면 쌍지리의 한 두메 산골이다. 쌍령산을 주봉(主峰)으로 하여 산줄기가 좌우에 북남으로 뻗어내려 삼태기같이 골짜기를 이루고 있는데, 여기에 무송 윤씨(茂松 尹氏) 일가들이 60여 호 살고 있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병자호란 때 9대조 할머니가 세 아들을 데리고 이곳에 피난 와서 살게 되었다 하며, 족보에 의하면 큰아들은 자손이 없고 아래 두 형제의 자손들이 현재 이 골짜기 주민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내가 태어난 날은 임술년(壬戌年) 음력 11월 17일인데, 이를 양력으로 고쳐보면 다음해, 즉 1923년 1월 3일이 된다. 그러나 호적에 11월 17일로 올렸으므로 1922년생으로 통용되고 있다. 그 해 10월에 내 둘째 조카가 출생하였기 때문에 어머니는 같은 안채에서 해산하지 못하고 평소에는 쓰지 않던 뒤채에 있는 방에 급작스레 불을 때고 거기서 나를 낳게 되었다.
땅거미가 조금 지나서 사내아이를 낳았다. 탯줄을 자르고 아기를 산모 옆에 뉘어 놓았는데, 아기가 울기를 그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지러지게 우는 소리가 이상하여 들어 보니 방바닥이 너무 뜨거워 아기의 한쪽 볼이 빨갛게 데어 김이 무럭무럭 나고 있었다 한다. 이 아이는 출생과 동시에 화인(火印)이 찍히게 된 것이다 .무엇을 증명하기 위한 화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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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고향 쌍지리 마을 입구의 표지석 / 무송 윤씨 집성촌이라는 것과 표지석 너머 교회건물이 나의 뿌리를 상징하는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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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추수 약 100석을 하는 중산 농민 기독교 가정에 태어났다. 할아버지 윤관순(尹寬淳)께서는 몹시 가난하여 30세가 되도록 장가도 못가고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면서도 근검저축하여 골짜기에 땅이 나는 대로 사 모아 소지주가 되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40세에 독선생을 두고 한학(漢學) 공부를 하여 한시(漢詩)를 지을 수 있을 정도로 학문을 닦은 후, 벼슬을 할 뜻을 품게 되었다.
당시는 정치 정세가 혼란한 한말(韓末)로, 벼슬을 하려면 권세 있는 줄을 잡아야 되는 형편이었으므로 서울에 올라가서 세도가 한창이던 민영휘(閔永徽)댁을 찾아갔다.
땅 몇 마지기 판 돈을 바치고 기회를 엿보고 있던 중, 민대감이 경향 간에 있는 토지를 사 모은다는 말을 듣고 용인에 있는 땅을 소개하여 주었다. 그런데 이 땅은 용인에 낙향하여 살고 있던 이모(李某)대감의 과수댁 소유의 땅으로 관리인이 소유주 모르게 팔아먹은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과수댁은 노발대발하며 민대감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기 모르게 땅을 사들인 것을 원망하였다. 뜻밖에 이런 편지를 받고 대노한 민 대감은 어느 놈이 이 따위 땅을 소개하여 입장을 곤란하게 만들었는지 조사하게 하니, 곧 소개자가 양지 땅의 윤모(尹某)임이 밝혀졌다.
민 대감은 당장 불러다가 불호령을 쳤고, 할아버지께서는 모든 꿈이 일조일석에 깨지자 낙심과 절망에 빠져 서울을 떠나 하향 길에 올랐다. 그러나 이 엄청난 충격이 화병이 되어 김량(金良)에서 와병하게 되었다. 급보를 받은 집에서는 사람과 가마를 보내 모셔왔는데 그대로 병석에 누워 회복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할머니께서는 용완 땅에서 시집 온 경주 이씨이신데 성격이 활달하고 통이 커서 할아버지와는 대조적인 인물이었다. 할아버지께서 근엄하고 의지력이 강하며 근검절약에 철저한 분인데 비하여 할머니께서는 손이 크고 후하여 자주 내외 간에 충돌이 있었던 모양이다. 동구 앞 참나무 모퉁이에 쌓인 깨진 질그릇은 모두 용완 할머니 댁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추수 백 석의 소지주였으나 집은 그야말로 초가삼간으로, 한번은 여름 장마에 집이 쓰러져 할머니와 어린 아들이 그 밑에 깔리고 말았다. 큰댁 사랑방에서 주무시고 계시던 할아버지께서 황급히 달려와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쓰러진 지붕의 이엉을 벗기고 보니, 할머니와 어린 아들은 기적적으로 손가락 하나 다친 곳 없이 무사하였다 한다.
당연히 튼튼한 새 집을 지어야 할 것이었으나 할아버지께서는 워낙 검약하시던 분이라 쓰러진 집을 다시 일으켜 약간의 수리를 하고는 그대로 살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할머니는 새로 집을 지으셨다. 식구는 아들 한 분과 도합 두 분밖에 안계셨는데도 할머니는 대청이 여섯 간이나 되는 큼직한 집을 지으려 하였다. 그런데 뜻밖의 장애가 생겼다. 집안의 종숙 뻘 되는 남자들이 과부가 자기네 집보다 큰 집을 짓는 것을 시새워 못 짓게 방해를 놓은 것이었다.
보통 다른 여자 같으면 그대로 기가 꺾여 단념할 터이지만 할머니는 그럴 분이 아니었다. 하루는 동리의 어른들을 위하여 큰 연회, 요새 말로 파티를 열어 혀가 꼬부라지도록 술과 고기를 실컷 대접하였다. 그랬더니 반대가 싹 없어지고 할머니가 하고 싶은 대로 큰 집을 짓게 하였다 한다.
집을 짓느라고 뒷간을 옮기다 보니 지붕에서 엽전 꾸러미가 수없이 나와서 건축비를 흥청망청 썼다고 한다. 새 집을 지은 후 그 넓은 대청은 동네 과부들의 집합장소가 되었다. 할머니는 인심도 후하여 춘궁기에 쌀 떨어진 동네 사람들이 쌀을 꾸러 오면 말을 고봉으로 수북하게 얹어주고, 그 위에 한 되를 덤으로 더 주어 후덕하기로 소문이 났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