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성함(名):병철(秉哲), 호(號):지정(芝亭))께서는 과부의 외아들로 귀하게 자라나셨다. 누이 한 분이 있었으나 젊어서 과부가 되어 친정에 돌아와 있다가 인생을 비관하여 간수를 마시고 자결하였으므로 매우 외롭게 자랐다.
아버지는 할아버지 성격을 많이 닮으셨는지 매우 엄격하고 의지가 굳은 분이었으나 속으로는 인정이 많고 다정다감한 분이었다. 본래 의학을 공부하여 의사가 되고 싶어 했으나 오랫동안 슬하를 떠나 서울 유학을 할 형편이 아니었으므로 당시 정부에서 단기 수련으로 양성하는 양잠기수(養蠶技手) 자격을 얻고 돌아왔다. 잠시 동안이나마 서울에서 호흡한 개화의 공기와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한 아버지는 자신이 못 이룬 뜻을 자손을 통하여 이루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어머니 안승경(安承卿)께서는 죽산(竹山) 은석이라는 마을에서 시집오셨는데 약 천석(千石) 추수를 하는 죽산 안씨(安氏)집 따님이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밑에서 자라셨다고 하는데 성격이 너그럽고 대범하여 매우 부지런한 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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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아버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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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4남 3녀 중 막내이다. 내 아래로 사내동생이 하나 있었으나 여섯 살 때 이질로 요절하였다. 그는 얼굴도 잘 생기고 머리도 좋아서 온 집안의 촉망과 귀여움을 받았는데 명이 짧아서 일찍 갔으니 애석한 일이다.
큰형님은 나보다 22세나 연장이어서 나에게는 그야말로 부형이었다. 아버지의 교육열에 따라 양지(陽智)에 가서 보통학교를 다니고 서울에 가서 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고등공업학교까지 졸업하여 광산기사가 되었다. 그 아래는 딸들로 세 분 누님이 있고 그 밑으로 아들이 셋 있어서, 나는 두 형과 두 조카와 함께 연령차는 있으나 다섯이서 함께 자라게 되었다.
두 형과 큰조카는 고개 너머 시오리(十五里)나 되는 원삼(遠三)학교에 다녔다. 어린 아이들의 원거리 통학의 불편을 통감하여 아버지께서는 대동강습소라는 사립학교를 설립하여 동네아이들을 모아 교육을 하였다. 둘째 조카와 나는 이 강습소에서 2학년 과정까지 수학하였는데, 선생님은 1학년 때는 안성사람 주장생 선생, 2학년 때는 김량사람 이규호 선생이었다.
이 강습소에서는 조선어, 산술, 일어 등 보통학교의 정규과목 뿐만 아니라 창가도 배우고 찐뽕이라는 야구식 공치기 놀이도 하면서 재미있는 학동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강습소는 규모도 작고 또 공인된 학교도 아니어서 부족함이 많았으므로, 아버지는 원삼학교에 다니는 두 분 형과 큰조카, 그리고 작은조카와 나, 도합 다섯 명 자손의 교육을 위해 안성 향교(鄕校)골에 집을 사고 안성공립보통학교에 전학을 시켰다. 큰형수가 살림을 맡으시고 두 아들과 세 시동생의 뒷바라지를 해주셨다.
나는 1929년 안성공립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학하여 6학년 졸업 때까지 5년 간 안성에서 지냈는데, 어머니를 떠나 있다는 것 외에는 그리운 추억에 찬 소년 시절이었다. 전등불과 자동차 등 신문명에 처음으로 접하였고 일본사람도 처음 보았다.
5학년 담임선생에 김영만(金永萬)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다재다능한 분이어서 노래도 잘하고 옛날이야기도 잘 해주셔서 대단히 인기가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교장선생이 조회시간에 김영만 선생이 다른 곳으로 전임하게 되었다고 발표하였다. 충격을 받은 우리들은 누구의 지시도 없었음에도 모두 뒤로 돌아서 근처 산으로 도망을 갔다.
학교에서는 교장선생 이하 크게 당황하여 쫓아와서는 정부의 명령이라 어찌할 수 없음을 설명하였으나 우리들은 어린아이의 순진한 마음에 김 선생님과의 이별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결국 김 선생 자신이 울며 간청을 하여 우리들도 체념하고 산을 내려왔다.
안성학교 생활 중에서 또 한 가지 생각나는 것은 학예회에서 내가 독창을 한 일이다. 앞서 말한 김영만 선생의 지도로 학예회에서 할 합창단의 노래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김 선생님이 나보고 독창 순서에 나가도록 지명을 한 것이다. 독창 순서는 두 번이 있었는데, 나보다 목소리가 고음(高音)인 한(韓)이라는 아이보고는 <고드름 고드름 수정고드름>이라는 노래를 하라고 하고 나에게는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라는 <오빠생각>을 선정해 주었다.(註)
내 목소리는 그 후 탁한 쉰 목소리로 변하여 성악가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고 말았는데 그때 김 선생이 무엇을 어떻게 보고 나를 독창 가수로 선정하였는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註 오빠생각(작사 최순애 ‧ 작곡 박태준)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때
우리 오빠 말타고 서울 가시며 /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 기럭 기러기 북에서 울고 / 귀뚤 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이 노래는 계집아이가 서울 간 오빠를 그리며 부르는 노래인데, 나는 사내아이이므로 <오빠>를 <형님>으로, <비단구두>를 <가죽구두>로 고쳐서 불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