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아버지는 화성군 3개 면의 지서주임을 맡고 계셨다. 아버지는 이때 부임지마다 ‘새마을운동’ 같은 것을 펼쳤다. 당시 농촌마을에서 농한기가 되면 도박이 횡행했는데 아버지는 도박금지운동 등 계몽운동을 펼치고 하천개수, 정화조설치 장려운동을 하셨다. 당시는 변소가 따로 없이 잿간에다 용변을 보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정화조를 만들고 “정화조의 오물은 거름으로 쓰라”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말하자면 아버지는 당시 근대화운동을 이미 한 것이었다.
사실 마을주민 계몽이나 근대화 운동은 굳이 해야 한다면 경찰보다 군수나 면장이 해야 할 일이었다. 그만큼 아버지는 선진적인 의식과 열정을 가진 분이었다. 그래서인지 일본인인 화성경찰서장이 아버지를 무척 아꼈다. 지서장은 일본인을 시키지, 절대 한국인을 시키지 않는 것이 관례였는데 아버지를 시킨 것이다.
그런 아버지였지만 아들에게는 잔 정 하나 없이 냉철했다. 여전히 아버지는 어린 내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벽으로 존재했다. 집에서 공부하다가 바깥에서 아버지 기침소리만 들려와도 부르르 떨릴 정도였다. 늘 아버지 앞에서는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로 반듯해야 했고, 사나이의 기상(氣像)을 잃어서도 안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학업성적도 줄곧 1. 2등을 놓치지 않았지만 ‘정신을 한곳에 쏟으면 무슨 일인들 못하랴’ 라는 뜻을 가진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 이라는 경구를 책상 앞에 붙여놓고 매일 마음에 새겼다. 참고로 ‘정신일도 하사불성’은 중국 남송(南宋)시대에 편찬된 《주자어류(朱子語類)》에 나오는 말로 저자는 여정덕(黎靖德)이라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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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신일도 하사불성, 나는 지금도 이 경구를 목판에 새겨 거실에 걸어놓고 내 삶의 신조로 여기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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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도 마음을 둘 곳이 없던 소년기…. 열 살 때 나는 꿈에도 못 잊던 어머니, 생모(生母)를 만났다. 어느 날 둘째 삼촌의 손에 이끌려 어머니가 살고 있는 충청도의 이모집으로 갔다. 거기에 꿈에 그리던 어머니가 계셨다. 생이별 후 5년 만에 만난 것이었다. 그때의 기분을 뭐라 형언할 수 있겠는가.
그 후로 어머니와 나는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것이 유일하게 나눌 수 있는 모자(母子)의 정(情)이었고 그렇게라도 내가 엄마의 품을 느낄 수 있는 것도 꿈같은 일이었다.
글을 모르는 어머니는 대필(代筆)을 시켜 아들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내가 답장을 써 보내면 대필자를 통해 어머니는 또 아들의 편지를 읽으셨다.
어머니가 보내준 편지를 읽을 때면 내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물론 어머니도 내가 보내 준 편지를 읽으며 우셨을 것이다. 나는 어머니가 보내 준 편지들을 항상 주머니에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지니고 다녔다. 그리고 어머니가 생각날 때마다 꺼내 읽었다. 편지가 너덜너덜 다 헤어질 때까지.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한테 걸렸다. 이놈이 암만해도 이상했던지, 어느 날 아버지는 내 주머니 검사를 하셨다. 그 후 나는 다시 어머니의 편지를 받을 수도 없었고, 보낼 수 없었다.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편지 왕래 하지마라’고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오가며 친할머니나 친모가 아닌 손에 크며 그나마 내 마음을 달래주던 엄마와의 편지마저 단절되자 나는 더욱 외로웠고, 마음 둘 곳이 없었다. 그런 현실에 대한 도피였을까. 4학년 때 나는 또 하나의 취미에 심취했다. 다름 아닌 독서였다.
당시 나는 어린이 신문인 <소국민신문>을 구독했는데 그곳에 연재되는 소설을 열렬히 읽었다. 화성에서 지구를 침공해 온다는, 이를테면 공상(空想)소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 일본 소설 중에 우리나라의 홍길동전(洪吉童傳)하고 비슷한 ‘오태랑’이라고 있었다. 주인공이 자기 모습을 자기 맘대로 바꾸며 악인을 징계하고 정의를 일으킨다는 그런 내용이었는데 그 소설에 상당히 심취했다.
뿐만 아니라 이때 나는 학교에 비치되어있던 일제의 소년문고를 다 떼었다. 한 40여권 되었을 것이다. 집에서 학교까지 거리가 한 10㎞ 거리였는데 나는 그 문고본 책을 들고 다니며 읽었다. 심지어는 수업시간에 몰래 숨겨 놓고 보기도 했다. 당시는 일제가 조선어를 가르치지 못하게 할 때였으므로 학교의 문고본은 죄다 일본의 역사인물이 나오는 스토리였다. 그러다보니 역사소설과 탐정소설에 흠뻑 빠지기도 했지만 자연히 일본역사도 많이 알게 되었다.
나는 열독(熱讀)에서 나아가 직접 작문(作文)을 하기도 했다. 이야기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잡지에 응모했는데 입상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