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과 문학에 깊이 심취하며 문과(文科)나 예능계통이 내 적성에 맞다고 생각했던 나는 공과(工科)계통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결국 아버지의 뜻대로 1941년 현 서울공업고등학교의 전신인 경성공업학교 전기과(電氣科)에 들어갔다.
경성공업학교는 일제식민지 당시 조선에서 이공계로는 최고 명문의 중고등학교로서 당대 수재들이 수학했다. 참고로 시인 이상(李箱)도 경성공고(1926년 입학) 건축과 출신이다.
그런데 통학이 전쟁이었다. 수원 아래 병점(餠店)에서 8㎞ 정도 들어간 지점에 있는 우리 집에서 서울의 대방동 경성공업학교까지 무사히 등교하려면 새벽 4시에 집을 나서야 했다. 집에서 나와 병점역까지 걸어가 통근열차를 타고 영등포역에 내려서 한 4㎞를 걸어 학교까지 가야 했던 것이다. 하루에 24㎞를 왕래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항상 뛰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시간을 도저히 맞출 수가 없었다.
나는 학교 검도부에 들었는데 아버지가 원래 검도를 하셔서 그 영향을 받은 탓도 있었다. 나는 초단으로 학교 수석대표 선수로까지 뛰었다.
강한 아들로 키우려는 아버지의 냉철한 양육은 경성공업학교 시절에도 계속되었다. 아버지는 ‘적당히’가 없었고 절대 지면 안 되었다. 아버지는 내가 외투조차 입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엄동설한의 그 먼 등하교 길에도 아버지는 교복 외엔 외투를 못 입게 했고 아예 사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경성공업학교 시절 만날 국방색 교복만 입고 학교를 다녔다. 그러다보니 겨울이면 손이고 발이고 동상이 걸리고 얼음이 배겨서 퉁퉁 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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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시대 경성고등공업학교 (사진출처/동아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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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그 얼음을 빼주신다며 아버지는 함지박 같은 데에 콩을 가득 채워 넣고 그 속에 내 손발을 넣어 문질렀다. 내가 덜덜 떨자 아버지는 “춥냐?” 하고 조용히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아버지는 “이놈, 아직 멀었구먼. 따라와!” 하시며 벌떡 일어나셨다. 아버지는 나를 우물가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옷을 다 벗으라고 했다. 내가 영문을 몰라 하며 우물쭈물하자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사내 새끼가 그렇게 약해서 무엇에 쓰냐! 이놈아 빨리 벗어!”
내가 옷을 다 벗자 아버지는 얼음 같은 우물물을 바가지로 퍼서 인정사정없이 끼얹었다. 내 입에서는 비명이 절로 터져 나왔지만, 그렇다고 비명소리도 함부로 내서는 안 되었다. 아버지는 또 새끼줄을 감은 방망이로 깡깡 언 내 몸뚱아리를 빡빡 문질렀다.
아버지는 아들이 장차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그리 하려면 아들이 남들보다 앞서나가는 교육을 받아야 했고, 또 누구보다 강해야 했다. 아버지는 내가 경성공업학교를 졸업하면 지금의 공대(工大)인 고등공업학교를 가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고등공업학교를 들어가면 일본군에 끌려가도 기술장교가 된다. 기술장교가 되면 전선으로 나가지 않고, 따라서 전투에도 나가지 않는다.”
당시는 조선청년들에 대한 일제의 징병(徵兵)이 심화되고 있었으므로 아버지는 내가 일본군에 끌려갈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내게 일본군에 끌려가게 되면 기회를 봐서 탈출해 광복군으로 들어갈 것을 미리 일러두었다.
“어떻게든 대륙으로 도망가라, 도망하게 되면 광복군을 찾아가라, 김구 선생을 찾아가라!”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眞珠灣)을 공격하며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이때부터 학교에서는 영어가 사라졌고, 대대적인 근로동원이 시작되었다. 3학년 무렵 우리 전기과 학생들은 전지 만드는 공장에 동원되었다. 몇 달씩 작업을 할 정도로 학업보다는 근로동원 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4학년이 되어서는 아예 취업실습을 나갔고 5학년 올라가던 해인 1945년 3월 단축 졸업을 시켰다. 그만큼 전세(戰勢)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증좌(證左)였고, 일본이 불리한 형국이라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