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경성공업학교를 졸업한 나는 일제의 국영기업격인 <국제통신주식회사>에 취업했다. 그때 경성공업학교 같은 갑종학교를 나오면 조선인은 45원의 월급을 받았고 일본인은 그보다 갑절인 90원을 받았다. 일본 사람의 경우는 본국을 떠나 조선에 나와 일하고 있다고 해서 명목상 재근(在勤)수당이 붙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는 조선인임에도 불구하고 90원을 받았다. 당시 국제통신에는 조선인은 나 하나밖에 없었는데 아마도 하나밖에 없는 조선 사람만 쏙 빼기가 민망했던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당시 90원이면 거금이었고 나는 최고급 대우를 받는 통신회사의 사원이 된 것이다.
국제통신공사는 지금으로 치면 <KT>같은 통신 국영기업체로 일본 도쿄(東京)에서 부산(釜山)을 거쳐 만주(滿洲), 만주에서 봉천(奉天)을 잇는 지하 케이블 망을 설치, 관리하는 회사였다. 이 통신망은 일본 본토에서 한반도를 관통해 관동군이 있는 봉천까지 연결되어 있었는데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국제통신주식회사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중차대한 통신공사이다 보니 조선인은 배척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세가 불리해짐에 따라 일본인들이 대대적으로 전선에 투입되던 터라 내가 딱 한 사람 뽑힌 것이었다. 그때 전기과목 선생님이 나를 추천했는데 마침 통신공사 부장과 동창이었던 탓에 운도 작용한 결과였다.
나는 이때 아버지의 굴레를 벗어날 절호의 기회로 보고 이북의 진남포와 함흥을 근무지로 지망했다. 그런데 그걸 아버지가 아시고 노발대발 하셨다.
“지금 시절이 수상하고 시국이 험악해가는 판에 왜 쓰잘데기 없이 멀리 떠나려고 하느냐! 이런 때일수록 타관객지로 보다는 집 근처에 있어야 한다.”
아버지는 나를 나무라고 학교로 찾아가 이북근무 지망을 전부 취소시켰다. 결국 나는 경기도 오산(烏山)으로 근무지 발령을 받았다. 결국 취업을 틈 타 지옥 같은 집을 탈출하려는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나는 수원 집에서 자전거를 타고 오산 중계소로 출퇴근을 했다. 어느덧 어엿한 청년이 되었고 고급 엔지니어가 되어 사회에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그런데 불과 근무 넉 달여가 되었을 무렵, 해방이 찾아왔다. 워낙 일제에 길들여져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해방은 나에게 기쁨이라는 의미로서보다는 뭔가 세상이 크게 변화한다는 것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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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시대 경성시내에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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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 되고 일본인들이 다 본국으로 귀환하니 중계소에 소사와 허드렛일 하는 아이 하나만 빼고 나 하나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내가 일약 소장을 맡게 되었다. 당시 ‘38이남’엔 개성, 서울, 천안, 김천, 부산 이렇게 60㎞로 간격으로 중계소가 있었는데 다 합쳐서 조선인은 딱 두 사람밖에 없었다. 당시 소장은 요새로 치면 사무관 정도인데, 나는 한꺼번에 벼락감투를 쓴 것이다.
급작스럽게 찾아온 해방…. 정치, 경제, 사회, 모든 게 혼란이었다. 특히 극심한 좌우이념(左右理念)대립이 조선반도에 휘몰아쳤다. 이때 경성공업학교 출신들은 노조활동을 하며 거의 좌익활동을 했지만 나는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해방 3년 전 경찰을 그만두었지만 아버지가 반동(反動)으로 몰린 까닭도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유물사관(唯物史觀)같은 걸 가르쳐 준 탓에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그다지 좌익에 호감을 갖지 않았다. 그때 시국을 논하는 친구들 모임이 활발했는데 대개 좌익사상을 선동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인민일보, 노동신문 같은 것을 구해보고 토론을 하기도 했는데, 나는 “어떻게 세계를 물질로만 보느냐?”며 사회주의 이념을 반대하는 입장에서 토론을 하게 되었다.
유물사관은 해방정국의 시대상황이나 청년들에 입장에서 보면 매력 있는 이념인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나는 반대 입장에 섰고 그러다보니 친구들 사이에서 ‘왕따’를 당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