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아버지가 충무로에 집을 마련하게 되어 수원을 떠나 서울로 이사를 했다. 충무로에서 오산은 워낙 먼 거리라 출퇴근하기가 어려웠던 나는 통신중계소의 기숙사에 있었다. 그때 서울 중계소가 지금의 녹번동인 녹번리에 있었는데 나는 다음 해인 1946년에 사전협의도 없이 녹번리 중계소로 갔다. 대학을 다닐 생각으로 그런 것이었지만 무책임한 일이었다. 내가 오산중계소장의 대리이고 다른 직원이 없기 때문에 내가 없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는데 그랬던 것이다. 어쨌든 녹번리로 와서는 충무로 집에서 출퇴근을 했다.
중계소를 미군정(美軍政)이 접수할 즈음이었다. 나는 국제통신회사를 그만두고 마침내 아버지 앞에 장문의 편지를 써놓고 집을 떠났다. 이제 아버지의 굴레에서 해방되고자 했고, 독립하고자 했다.
그때 편지에 그동안 참았던 얘기,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다 했던 것 같다. 구체적으로 기억은 안 나지만 ‘아버지는 가정을 다스리는 방법이 잘못 되었다, 가정이 온통 경직되어 있다, 아버지한테는 편달을 받을 수가 없다’ 이런 내용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지만 난 나이 70이 되도록, 돌아가실 때까지도 아버지 얼굴을 고개를 쳐들고 보지 못했다.
집을 나온 이때 사무치게 마음속으로 그리움을 삭였던 어머니를 찾아가 만났다. 이때 어머니는 개가해 충남 대천(大川)에 살고 계셨다. 나는 어머니 집에 머무르며 모자의 정을 나누었다.
어차피 어머니와 함께 할 수 없는 운명…. 나는 보름정도 어머니와 함께 지내고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상경했다. 나는 어머니 집을 나서며 다짐했다.
‘이 중요한 시기에 어머니한테 빠져 있으면 안 된다. 이제 내 길을 가야 한다.’
역사의 전환기. 좌우이념대립 등 36년이라는 일제식민지에 길들여진 사회나 개인이나 극심한 정체성의 혼란을 앓고 있었다. 그것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산고(産苦)였다. 1948년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며 정치, 경제, 사회는 정립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상경한 나는 신문 공고를 보고 장충동에 있는 학원의 수학강사로 취업했다. 시간 강사를 하며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 하던 어느 날 가정교사를 하는 친구 하나가 “친척 집에서 가정교사를 소개해달라고 하는데 가지 않겠느냐”며 추천을 했다. 나는 수입이 변변찮은 학원 강사를 그만두고 어느 부잣집의 가정교사로 들어갔다. 그때부터 나는 좀 여유를 가졌다고 할까, 꿈을 갖게 되었다.
그 집은 자녀가 여섯 살 바기, 초등생, 중학생, 그렇게 셋이었는데 내가 다 가르쳐주기로 했다. 숙식도 그 집에서 했는데, 부모는 우선 정신적인 것부터 가르쳐달라고 했다. 여섯 살 바기는 여자아이였는데 수재였다. 훗날 그녀는 서울대를 거쳐 파리유학을 했다.
가정교사 생활로 1년여가 지났을 무렵 나는 우연히 신문을 보다가 육군사관학교(陸軍士官學校) 생도모집 공고를 보게 되었다. 그때 ‘육군사관학교’라는 말이 처음 나왔다. 그 전에는 ‘조선경비대’라고 해서 젊은이들이 호응을 별로 안 했는데, 나는 육군사관학교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다.
1948년 정부수립 후 <조선경비대>를 모태(母胎)로 육군사관학교가 창설되어 생도(生徒)를 모집한 것이었다. 그때 공고의 내용 중에 ‘성적이 우수한자는 도미(渡美)유학에 우선권을 부여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공부를 더 하고 싶은 갈증이 있었던 나는 그 구절이 특히 마음에 갔다. 물론 알게 모르게 아버지로부터 주입된 사내대장부 근성과 역사소설에서 읽은 전쟁영웅들에 대한 동경(憧憬)이 있었기 때문에 군인에 대한 호기심이 내 의식 속에 강력히 자리 잡고 있었던 것도 한몫 했을 것이다.
나는 군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지원서를 냈다. 응시해 17대 1의 경쟁을 뚫고 무난히 합격했다. 그리하여 나는 1948년 11월, 8기로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했다. 내 삶의 새로운 전환기를 맞은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