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탄강에서 의정부 쪽으로 흐르는 수로가 있었다. 우리는 조그맣게 뚫려 있는 도로 양쪽으로 흐르는 수로를 타고 전차를 향해 접근해 들어갔다. 상당한 양이 물이 고이는 수로의 깊이는 허벅지를 넘어 허리 가까이 되었다. 말하자면 거기까지만 은폐되었다. 그때는 철모가 아닌 플라스틱 재질의 헬멧이어서 방호도 너무 허술했다.
내가 선두에 서고 열 명의 부하들이 뒤따랐다. 거기에는 다른 중대에서 온 선임하사인 일등 중사도 하나 있었다.
우리는 낮은 포복으로 인민군 전차 쪽으로 접근해 들어갔다. 그러나 이는 전투이론에 없는 무모한 행위였다. 백주에 적의 눈에 띄지 않을 은폐가 확보되지 않는 공격이라는 것은 시쳇말로 죽으러 가는 거나 매 한가지였다. 그렇다면 이런 작전명령을 내린 연대장의 잘못이 아니냐고 묻겠지만 그건 아니다. 연대장의 명령은 그럴 수 있지만 어떻게 접근하느냐, 어떻게 잠복하느냐는 것은 전적으로 소대장의 책임이다. 그러니까 내가 무모했던 것이고 이는 우리가 제대로 실전훈련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쳐들어 온 적을 어떻게든 막고 전선을 사수하겠다는 당위성에만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300ｍ쯤 올라갔을 때였다. 따다다다다! 하는 굉음과 함께 총알이 날아들었다. 동시에 우리는 전부 혼비백산해서 머리를 쏙 집어넣으며 엎드렸다. 전방에서 “손들어!”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당황했다. 너무 일찍 발견된 것이다. 미처 예상하지 못 한 일이었다. 인민군 척후병들이 고지에서 전부 보고 있었던 것이다.
앞에 척후병들이 배치되어 있고, 공격이 들어오니 우리는 제대로 방어조차 할 수 없는 사태를 맞았다. 열 명 밖에 안 되는 데다 총을 소지하지 않고 있으니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와 맞닥뜨린 것이다. 더구나 지뢰폭약이 맞아서 터지게 되면 같이 날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지뢰가 폭파되지 않도록 물에 담그고 엎드려서 전방을 살폈다. 그러자 또 따다다다 하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적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어디서 오는지 알지도 모르는 상태였지만 지근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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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군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소련제 T34탱크를 몰고 파죽지세로 전진해오고 있는 인민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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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잠복한 인민군 수색대에 전면적으로 포위되고 만 것이다. “손들어!” 우리를 포위한 인민군이 다시 소리쳤다. 나는 생사의 기로에서 결딴을 해야 했다. 그 수 초 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수많은 생각이 스쳤다. 저항하다 장렬히 전사할 것인지, 죽음을 무릅쓰고 도피할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투항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했다. 나는 도피를 택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 혼자만 M1 소총을 지니고 있는 판국에서 저항한다는 것은 개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는 “포로가 되면 아무 것도 아니다! 후퇴하자!”고 소리쳤다. 우리는 물속을 엉금엄금 기고 뛰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뒤로 인민군의 따발총이 불을 뿜어 댔다. 엎드리는 병사, 도망가는 병사를 향해 총알이 빗발쳤다.
인민군 수색대는 공격을 하며 우리 뒤를 쫒았다. 그들은 자동소총, 따발총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나만 M1소총을 가지고 있는데 언제 그것을 꺼내 조준한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부하들 중 몇은 뛰다가 혼이 빠져 주저앉거나, 엎드려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꼼짝도 못했다.
수로를 나와 곡선, U자형으로 된 경사진 도로를 올라타 넘어가야 은폐가 되는 상황이었고 트럭에서 내렸던 자리로 갈 수 있었다. 우리가 도로를 넘어갈 때 총알이 옆으로 와서 쉭쉭 박히는 소리가 났다. 우리는 최대한 몸을 은폐하고 대전차지뢰를 집어던지며 도로를 향해 정신없이 뛰었다. 이때 어디선가 콰광쾅!, 하는 굉음과 함께 M3포가 인민군 척후전차를 향해 날았다. 사단에 지원 나와 있는 야포중대의 공격이었다. 일명 강아지포라고 부르는 105㎜ M3포는 곡사포로 4천ｍ를 날아가 내리꽂는 위력이 있었다. 탱크를 쪼갤 수 있는 가공할 위력이었는데, 그 포 하나가 인민군 전차에 맞았다.
그때 명(明) 중위가 이끄는 또 하나의 결사대가 있었는데 그가 총탄에 맞았다. 우리 야포를 맞고 인민군 전차가 화염에 휩싸이자 명 중위가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1000ｍ 이상 떨어져 있어서 그를 엄호사격 하기에는 너무 멀었고 그것을 수습하려다가는 우리도 다 잡히거나 사살될 수밖에 없었다.
도로를 넘을 때 더 이상 도망가기가 힘들 정도로 총알이 맹렬히 날아들었기 때문에 우리는 도망을 멈추고 전부 엎드려 있었다. 이때 “소대장님!” 하는 고함 소리가 들렸다. 최태원 하사가 남은 소대원들을 이끌고 근처에 잠복해 있다가 지원을 온 것이다. 최 하사와 소대원들이 쫒아오는 인민군을 향해 엄호사격을 하기 시작했다. 결국 인민군의 추격과 공격이 멈추었다.
도중에 내 바짓가랑이를 잡고 “소대장님!” 하는 병사가 하나 있었다. 나는 어찌할 도리 없이 “죽은 체 하고 있어!” 라고 소리치며 그를 뒤로 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나중에 나는 그를 안강, 포항 전선에서 헌병의 연락을 받고 만나게 된다. 그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고 인민군 포로가 되었으나 도망쳐 나와 나를 찾았던 것이다. 그는 신원이 보증되어 다시 국군으로 복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