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를 넘어와서 보니 나도 헬멧의 반이 날아간 상태였다. 다행히 공간이 있어서 머리를 다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 무사히 도망쳐온 결사대원은 열 명 중 다섯밖에 안 되었다. 우리는 첫 전투에서 다섯 명의 전우를 잃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다행이었다. 명 중위가 이끄는 결사대는 전원이 전사(戰死)했기 때문이다.
겨우 살아 돌아온 우리는 비로소 전쟁의 공포를 알았다. 그때 일등 중사가 흥분과 울부짖음으로 “미 B29가 날아와서 다 폭파시킨다고 하더니 이게 뭐냐!”라면서 누구인지 모를 원망과 욕지기를 퍼부어댔다. 사실 우리는 경황없이 전쟁을 맞았고, 경황없이 전투에 나갔던 터라 죽음에 대한 공포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이미 우리는 삶과 죽음이 종이 한 장 차이도 안 되는 전장의 한 복판에 던져진 것이었다.
살아남은 우리는 망연자실, 전우를 잃은 비통함으로 트럭을 타고 덕정리 연대본부로 복귀했다. 연대로 철수를 하니 연대장이 “살아와서 다행이네. 좀 쉬게.”라며 덤덤히 말했다.
“실패했습니다.”
“응, 보고들어서 알아.”
연대에서 척후병을 보냈는지 연대장은 우리가 1차 공격도 못하고 오합지졸, 고군분투하다가 간신히 살아 돌아온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정도였으니 인민군도 국군의 지리멸렬을 눈치 채고 있었다. 더구나 농번기휴가 등으로 외출했던 사병들이 하루만에 원대복귀 하기는 힘들고 며칠씩 걸렸다. 그러니 어떤 데는 중대장이 없고, 어떤 데는 소대장이 없었다. 사실 우리 8기생이 배출되면서 국군에 처음 소대장이라는 직책이 생겼고, 소대전투 개념이 도입되어 그에 맞는 훈련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특수전투랄지, 대전차폭파 전투 같은 것은 전혀 준비되지 않았던 것이다.
오후가 되어 연대장이 불렀다. 가보니 연대장 앞에는 철가모시 라는 57㎜ 대전차포 한 자루, 폭파하는 발전기, 폭약이 있었다.
“자네 전투지원 한다고 이런 것이 왔네!”
대대에서 공병대에 넘겨주라고 보냈던 모양이었다.
“여기서 옆으로 수색 쪽으로 가는 길로 올라가면 전곡 못 미쳐 인민군 전차부대의 길목이 나온다. 3·8 이북 남천리에서 내려오는 인민군 전차부대가 그곳으로 통과한다. 이것 가지고 가서 거길 막아야 한다!”
6월 25일 오후. 나는 다시 무사한 5명과 20명의 소대원을 이끌고 인민군에게 확연히 밀리는 동두천 덕정리 쪽을 우회해 연천 아래 전곡 쪽으로 향했다. 그때는 부대에서 중기관총을 가져와 지급해주었고 바주카포, 말하자면 로켓포도 무장할 수 있었다.
덕정리에서 한 4㎞키로 올라가니 큰 바위산이 하나 나왔다. 지형이 가로지르는 길에 바위산이 있고 반대편은 논이었다. 도로가 바위산을 끼고돌았으므로 그 너머에는 뭐가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여서 전방으로 척후병을 보내니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했다. 나는 “거기서 지키고 있다가 유사시에는 공포를 쏴 신호를 보내라.”고 하고 바위산에 폭파지점을 설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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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전쟁 당시 대전차 지뢰를 매설하는 공병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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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가 바위산 도로를 올라설 때 폭파를 하면 전차가 부서지거나 논바닥으로 쓰러질 것이다.’ 암벽을 쓰러뜨리는 전술이었다. 그때서야 우리는 공병의 병법이론을 적용할 만큼 정신을 차린 상태가 된 것이었다.
암벽을 폭파하는 고구마처럼 생긴 화약이 있다. 물렁물렁한 성질이어서 바위 틈바구니에 집어넣을 수 있는 화약이었다. 우리는 바위틈에 폭약을 설치하고 도화선을 달아 2백ｍ 정도의 길이로 전선을 연결했다. 자갈땅인 도로 바닥에는 대전차지뢰 다섯 구 정도를 매설하고 방공호(防空壕)도 팠다.
그때 우리는 50㎜ 기관포를 가지고 있었고, 네댓 명 빼고는 다 소총을 지니고 있었다. 2백ｍ 거리가 되는 논두렁 사이의 방공호에 엎드려 있다가 적의 전차가 나타나면 바위를 폭파하고 총을 난사하는 것이다.
우리는 방공호에 잠복해 촉각(觸覺)을 곤두세우고 신호가 오기를 기다렸다.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오후 3시쯤, 척후병의 신호가 들려왔다. 소리로 보아 약 1㎞쯤 거리였다. 우리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 인민군 탱크부대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