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8일 새벽 1시 경. 인민군 전차 두 대가 미아리고개를 돌파했다. 그들은 시내로 진입했고 아군은 퇴각했다. 이때 우리 7사단 집결지는 창경원이었다. 그러나 서울 마지노선이 무너지자 집결지로 가지 않고 다른 데로 새는 사병이 속출했다. 각자 알아서 도망을 갔고, 그 정도로 국군의 지휘체계는 무너져 있었다. 연락병도 어디로 사라지고 없었지만 나는 집결지인 창경원으로 향했다.
그런데 돈암동 전차종점으로 내려왔을 때 계급장도 없는 작업복을 입은 사내가 길을 가로막았다.
“어이 패잔병 이리와!”
나는 일단 멈춰 섰다.
“칼빈 이리 내놔!”
그때 나는 개인장비라야 총알 하나 남은 칼빈총 하나였다. 순간적으로 나는 그에게 총을 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체도 불분명하거니와 여러 사람이 잡혀서 통제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장해제 되면 그대로 포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무슨 권한으로 총을 왜 내노라는 거요!”라며 나는 칼빈총을 잡는 그의 손을 내리쳤다.
지금도 그들의 정체가 궁금하거니와 아마도 좌익치안대, 보도연맹, 인민군첩보대 중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차하면 자결할 작정까지 하고 있었던 내가 워낙 거세게 뿌리치니 그들도 더는 어쩌지 못했다.
돈암동을 지나 삼선교로 왔을 때 크릉, 크릉, 하는 소리가 들려 뒤돌아보니 인민군 전차 두 대가 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혼비백산, 재빨리 지하도로 뛰어 들어가 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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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음교를 돌파해 서울 시가를 전진하고 있는 T-34-85형 인민군 탱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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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가 지나간 뒤 나는 고개를 넘어 창경원으로 갔다. 그때 창경원 문은 활짝 열려 있고 그 앞에는 망가진 아군의 105㎜ 곡사포 몇 대가 꼴사납게 뒹굴고 있었다.
나는 창경원으로 들어갔다. 들어가 보니 멀리 국군 소령 하나가 보였다. 어슴푸레한 새벽녘이어서 희미하게 보였는데 장교 하나가 소총을 들고 있었다. 우리는 일단 서로를 경계하며 다가섰다. 가까이 다가서니 그는 9연대 부관이었던 최세인 소령이었다. 그는 내가 막 육사에서 9연대로 임관했을 때 공병대를 권유했던 행정참모 연대부관이었다. 우리는 서로 반가워가지고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아니, 부관님 어떻게 된 겁니까?”
“아, 나는 철수하는 부대의 집결지를 파악하기 위해 나와 있는데 최 중위는 여기 어쩐 일인가?”
최세인 소령은 그때 인사참모가 되어 책임자로 나와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의 과정을 쭉 설명하고 미아리가 뚫렸다는 말을 전했다.
우리가 전열(戰列)을 가다듬고 창경원을 나가려 할 때는 이미 인민군 전차가 문을 다 부셔놓은 상태였다. 결국 우리는 뒷문으로 황급히 빠져나왔다. 그리고 간발의 차로 인민군의 공격 망을 피해 창경원 뒷문을 통해 비원, 비원에서 돈화문으로 나왔다.
그때 우리는 군 철모가 없었다. 플라스틱 재질의 헬멧을 썼다. 군복이라고 해봤자 미군이 입다 버린 거니 전부 컸다. 주머니가 엄청 컸는데, 나는 거기에다 전투교본을 빽빽하게 채워 넣었다. 일종의 방호 무장(武裝)으로 총탄이 날아오면 뚫리지 않게 하려는 심산이었다. 그런 나를 보고 최세인 소령은 “최 중위, 무장 한번 야무지게 잘했네.”라며 배시시 웃었다.
돈화문을 빠져나올 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열어주는 사람이 없으니 문 밑의 틈새로 기어 나오는데 헬멧과 옷이 걸려서 빠져나올 수가 없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헬멧과 옷을 벗어 밀어내놓고 나왔다. 거기서 최세인 소령과 나는 서로 건투를 빌어주며 헤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