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환히 밝았다. 창경원을 빠져나온 나는 안국동 쪽으로 향했다. 그때는 이미 서울에 이른바 <좌익치안대>가 나와 활동할 때였다.
안국동 로터리에 들어서니 미군 화물트럭이 하나 정차해 있었다. 나는 총알 하나 밖에 없는 칼빈총을 겨누고 접근했다. 그러면서 “거기 누구야?” 하고 소리치니 누가 고개를 내밀었다. 운전병이었다. 내가 “왜 여기 있느냐”고 묻자 그는 “못 가게 해서 이러고 있습니다.”라며 곤혹스러워 했다.
그때 돈암동에서 처럼 계급장 없는 군복을 입은 사내들이 나와서 나를 에워쌌다. 나는 총을 겨누며 “물러서!”라고 호통을 쳤다. 그들은 머뭇머뭇 물러섰다. 지금까지도 의문이지만 여전히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내게 그렇게 폭력적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어쨌든 서로 총질과 충돌은 피했다.
트럭은 건빵을 잔뜩 싣고 있었다. 그러니까 보급차량이었다. 나는 사내들에게 “트럭을 내놓으라.”고 했다. 그들은 순순히 가져가라고 했다.
나는 트럭을 타고 운전병과 함께 시청으로 향했다. 시청 앞에 당도하며 트럭이 길 가운데에 있는 전차를 들이받았다. 더 이상 갈 수 없는 상태여서 내려서 보니 온통 난리통이었다. 시청에서 남대문까지 피난민들이 인산인해(人山人海)였다. 여자는 이고 업고, 남자는 보따리 짊어지고 “한강다리가 끊어졌대요,” 이런 말들이 돌며 와글와글 했다.
한강다리가 끊어졌으니 피난민들이 한강을 건너지 못 하고 용산에서부터 서울역까지 꽉 찬 것이었다. 인파를 뚫고 나갈 수도 없거니와 “어디로, 어떻게 갈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나는 남대문 근처에서 운전병과 헤어졌다.
나는 한강을 건널 심산으로 남대문에서 옛 병무청이 있는 후암동을 거쳐 육군본부가 있던 자리 뒷길로 해서 서빙고동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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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강다리가 끊기자 병사들은 제각각 배를 마련해 도강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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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보니 소달구지 같은 대형 화물을 싣는 화물선 배가 미군병력과 주요 보급품을 수송하기 위해서 정박해 있었고 미군들과 한국군들이 뒤섞여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미군 고문관들을 우선적으로 태우고 한국군은 접근을 막고 있었다. 이치혁 대령이 “나는 육군본부 작전국 차장 이치혁 대령이다.”라면서 한국군이 미군에 섞이지 않도록 정리하느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가만히 보니 한국군 같으면 가장 높은 계급부터 태웠겠지만 미군들은 철저히 선착순이었다. 대위, 중위, 상사, 중사 등등 고문관들이니까 각 부처에 흩어져 있었지만 계급이 아니라 도착순으로 태웠다.
“미 고문관이 빨리 건너가야 일본 오키나와 맥아더사령부에 연락을 해서 우리를 도우러 온다.”는 말들이 오가고 한국군은 일체 접근을 막았다. 따라서 한국군의 차례가 오기는 어려울 것 같고 그 화물선이 갔다가 온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방도를 찾기 위해 다른 배도 찾아보고 이런 저런 궁리도 했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더구나 계속 내린 비로 범람할 정도로 수위(水位)가 높았다. 경성공업학교 시절부터 한강을 두어 번 왕복할 만큼의 수영실력은 있었지만 흙탕물이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을 보니 도저히 건널 엄두가 나지 않았다.
궁리를 하며 서빙고 마을을 배회하고 있는데 어느 한옥 집에 장작개비를 쌓아놓은 것이 눈에 띄었다. 나는 그 장작개비를 갖다가 새끼줄로 엮었다. 일종의 작은 뗏목을 만든 것이다. 그 뗏목에 헬멧, 총, 탄대, 신발 등을 올려놓고 줄을 몸에 매달았다. 그리고 도도히 흐르는 한강 물을 필사적으로 헤엄치기 시작했다. 얼마쯤 헤엄쳤을까? 반포가 있는 건너편 둑에 당도했다. 그때 반포는 하천부지여서 오이, 참외, 가지, 토마토 밭이 쫙 깔려있었다.
한강을 건너니 비로소 긴장이 확 풀렸다. 배도 고프고, 잠이 몰려왔다. 이틀을 꼬박 굶었고 못 잤던 것이었다. 나는 밭에 있는 참외, 오이, 가지 등을 따서 배불리 먹었다. 비로소 살 것 같았고, 잠에 곯아 떨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