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강으로 간 것은 행운이었다. 그때 미아리에서 후퇴한 국군들의 많은 수가 남산으로 올라갔고 결국 인민군에 포위되어 모조리 전사한 것으로 전한다.
꿈결처럼 박격포 터지는 소리가 쾅, 쾅, 하고 들려왔다. 얼마나 잤을까? 포탄소리에 놀라 잠을 깼다. 내가 눈을 떴을 때 땅거미가 지는 강변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제서야 나는 ‘아, 내가 살아있었구나’ 하고 실감했다.
나는 기운을 차리고 몸을 추슬렀다. 주위를 돌아보니 이탈한 사병들이 버린 듯 소총, 탄대 등 군 개인장비들이 사방에 즐비하게 널려져 있었다. 칼빈을 소지하고 있던 나는 밭에 버려진 무기 중에서 M1이 있어서 바꾸어 재무장을 했다.
정확히 기억하기 어렵지만 이때가 아마 29일이 아니었을까 한다. 나는 다시 전의(戰意)를 다지며 이수교를 거쳐 남태령(南泰嶺) 고개를 넘었다. 고개를 넘자 총소리가 잦아들 정도로 비교적 조용했다.
당시 남태령 고개는 지금과 달리 마찻길 정도밖에 안 되는 길이었다. 고개를 내려가는데 아주머니들이 떡을 먹고 있었다. ‘참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침을 꼴깍 삼키면서 쳐다보니까 “아이고 장교님 배고프신가봐, 이리 와요.”라며 불렀다. 나는 염치불구하고 가서 떡을 하나 받아 한 입 물어 삼키며 가던 길을 재촉했다. 인민군이 서울을 거의 점령하고 전선(戰線)이 시시각각 남하(南下)하고 있는 상황이라 한가하게 지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왜 더 먹지 않고요. 싸우려면 배가 든든해야지.”
아주머니들은 “적을 꼭 무찔러 달라”며 내 양주머니에 떡을 미어지게 넣어 주었다. 육군중위 계급장에 무장을 한 나를 각별히 생각해주는 것 같았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걸음을 재촉해 과천에 당도하니 헌병들이 지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들로부터 안양의 금성방직이 패잔병, 낙오병들의 집결지라는 전령(傳令)을 받았다.
인덕원을 거쳐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집결지인 안양의 금성방직 공장에 도착하니 사병은 사병대로, 장교는 장교대로 공장부지에 집결을 시키고 있었다. 무리에 얼마쯤 앉아 있는데 갑자기 인민군 비행기가 나타나서 사격을 했다. 그 바람에 “도망치라.”는 지시가 떨어졌고 모여 있던 몇 백은 될 패잔병들은 야음을 틈타 다음 집결지인 수원으로 후퇴했다. 그러니 전투준비는 계속 무산되고 후퇴를 하는 국면을 면하기 어려웠다.
나는 군포를 거쳐 다음 집결지인 수원의 매산초등학교로 갔다. 가니 한 3백 명 정도가 교실마다 꽉꽉 차 있었다. 재편성을 하고 이튿날 전투준비를 위해 교실 바닥에 누워 잠을 청했다. 얼마나 잤을까? 우당탕거리는 요란한 굉음소리가 났다. 우리는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깼다. 잠자리를 만들기 위해 뒤에 쌓아둔 책걸상이 한꺼번에 무너진 것이었다.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나고 교실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러는 바람에 또 다 도망을 갔다. 적이 쳐들어 온 것으로 오인하고 허둥지둥 대피하기에 바빴던 것이다. 간신히 대열을 정비한 수백의 낙오병들이 결국 또 다시 뿔뿔이 흩어졌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누가 일부러 책걸상을 무너뜨린 의혹이 짙다. 적의 프락치가 침투해 아군의 전투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교란시킨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이 드는 일이다.
나는 수원에 온 김에 할아버지 집에 들렀다. 그렇지 않아도 생사를 몰라 애를 태우고 있던 할아버지는 내가 살아오자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셨다. 할아버지는 한사코 내게 부대복귀를 말렸다.
할아버지는 전선에 나가면 살아 돌아오기 어렵다면서 마루 밑에 굴을 파 줄 테니 거기 숨어 있으라고 하셨다. 그런데 내가 군인정신이 살아 있었는지,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의지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구차하게 숨어 살기는 싫었다. 나는 어떻게든 집결지를 찾아 재편성을 해서 전투에 참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하루 종일 나를 감시하고 있어서 뿌리치기도 쉽지 않았다. 결국 나는 “더워서 사이다 한 병만 사먹고 오겠다”고 하고 할아버지 집을 나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