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길로 나는 수원의 집결지로 향했다. 거짓말을 하고 할아버지의 청을 뿌리친 것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운명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할아버지 말씀대로 마루 밑에 숨어 있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인민군 치하에서 과연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을까?
6월 30일. 나는 수원 집결지에서 재편성되어 트럭에 실려 서울 대방동 서울공업고등학교로 이동했다. 집결하니 사단장인 유재흥[劉載興, 1921. - 2011.] 장군이 “여기 공병장교 있느냐”고 물었다. 내가 손을 드니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그때 공병장교는 나밖에 없었다.
나는 지하실의 사령관실로 안내되어 들어갔다. 일본 육사출신인 유 장군은 한국말이 서투르고 일본 말투였다. 6·25당시 수도사단장으로서 업무 수행능력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말이 있지만 그와 별도로 유 장군은 고고한 인품의 소유자로 장교들의 존경을 받는 분이기도 했다.
그때 또 나는 미제 대전차 지뢰를 처음 접했다. 동두천에서 본 대전차지뢰가 뚝배기같이 생겼는데 반해 그것은 납작한 모양이었다. 유 사령관은 납작한 모양의 미제 대전차지뢰를 보여주며 “이 지뢰를 봤느냐?”고 물었다.
“처음 보는 겁니다.”
“이게 미제 대전차지뢰다, 이거 하나면 인민군 탱크가 부러진다고 한다. 이것으로 인민군 탱크를 막아야겠다!”
살펴보니 사용설명서도 첨부되어 있었다. ‘뚜껑을 돌려서 뒤집어 끼우면 폭파작용을 할 수 있다.’ 대충 그런 내용의 설명서로 기억한다.
“이 대전차 지뢰가 지금 40여개가 와있다. 이걸 노량진 철교 밑에 .매설해라. 적에게 들키지 않게 해야 한다. 엄호병도 붙여주겠다!“
유 장군은 내게 구체적인 장소와 정보를 주었다. 그때부터 나는 20여 명의 공병대를 데리고 속전속결로 출전준비를 시작했다. 사실 그때도 편성이 형편없었다. 대대본부도, 본부중대도 없고, 대대장이 없어 대대본부 장악력이 없었다. 공병 대대본부에는 작전과, 정보과, 행정과, 보급과가 있고 4개 참모부가 있다. 그 중에서 작전, 정보 두과가 직접 전투상태를 장악하게 되어 있는데 그 조직체계가 무너진 상태라 내가 연락장교 비슷하게 사단 작전참모실을 들랑날랑 하면서 대대장 대리 격의 역할을 했다.
나는 병사들을 이끌고 영등포 로터리 쪽으로 향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피아(彼我)간의 치열한 교전 없이 간헐적인 사격만 주고받을 정도였다. 지금의 여의도로 가는 다리로 간 우리는 대방동 지하도 자리에 있던 둑에 대전차지뢰를 매설했다.
대방동의 구(舊) 공군본부 자리가 있던 곳에는 일제시대부터 <법덕온천>이 있었다. 그 일대에 인민군 포탄이 펑펑, 하고 떨어졌다. 이때 나는 천우신조로 죽음을 면하는 일을 겪었다. 당시 대방동 일대에는 묘지가 많았다. 지뢰매설을 하던 중 동기인 박 중위가 묘를 파간 움푹한 구덩이에 들어앉아서 담배를 피웠다. 그래서 내가 “야, 거기서 담배 피우면 어떡하냐!”고 타박을 했는데 그는 “뭐 어때? 너도 이리와 한 대 피워라!”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나는 못이기는 척 박 중위에게 갔다. 그때였다. 내가 박 중위 옆에 앉는 순간 내가 앉았던 자리에 포탄이 떨어졌다. 만약 그대로 있었으면 포탄에 맞아 절명했을 것이다. 정말 신통한 일이었다. 그 후 박 중위는 “야 이놈아, 내가 네 생명의 은인이다!”라며 놀려댔는데 그때만 생각하면 전율이 난다.
우리는 전차가 서울 강북 쪽에서 건너오면 바로 다리 교초에서부터 터지게끔 40발의 지뢰를 깔았다. 그 후 노량진철교 바로 너머에 수도사단 사령부가 있고 법덕온천 능선에 보병이 진을 치고 있었다. 대부분 보병이고 공병대는 거의 없었다. 보병전투가 벌어진 것은 아니지만 공병대가 호위병처럼 역할을 하면서 2, 3일 머물렀던 것 같다.
그런데 7월 3일, 인민군 전차가 아무 탈 없이 건넜다. 웬일인지 지뢰가 하나도 폭파하지 않았다. 인민군이 다 제거한 것이 분명했다. 사실 화력이 24시간 지뢰를 지켜주지 않으면 제 역할을 할 수가 없다. 우리가 잘못 묻어서 그랬는지, 40개가 다 철거당한 것은 지금까지도 의문스러운 일이다. 또한 전차가 다리를 건너 타도록 유도만 하면 되는 것인데, 그런 역할을 하는 부대가 없었다는 것도 문제이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등포 둑 대전차지뢰 매설로 인민군은 서울을 수중에 넣고도 2, 3일 동안 한강을 건너오지 못했고 아군이 한강전선에서 3일을 버틴 것은 의미가 있었다. 미군이 참전해 오산(烏山)까지 올라오는데 시간을 벌수 있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