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에 잠복한 후 얼마가 지났을까? 북쪽 전방에서 1개 중대 되는 인민군 보병이 행군해왔다. 그때 18연대 5중대가 앞에 있었다. 5중대가 선제공격을 하며 전투가 붙었다. 우리 앞에 있는 고지에서 전투가 붙었는데 인민군이 바로 돌격해 들어왔다. 인민군이 쏘는 포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M2포였다.
인민군의 우세한 공격으로 5중대가 밀려났다. 인민군이 앞의 고지를 돌파한 것이다. 그들은 고지를 점령하더니 금세 그 자리에서 호(壕)를 팠다. 우리가 잠복한 산이 높았기 때문에 그 광경이 잘 보였지만 약 500ｍ가 넘는 거리로 기관총이 가기는 어려운 사거리였다.
인민군 보병부대는 호를 파더니 호 속에 들어가 잠복했다. 그 얼마 후 어디선가 아군의 포가 인민군이 잠복한 호를 향해 날아들기 시작했다. 어디서 쏘는지 모르지만 포탄이 날아와서 고지 위 상공에서 터졌다. 그러니까 호 안에 숨은 인민군을 표적으로 하는 건데 상공에서 파편이 호로 쏟아지게 하는 공격이었다. 공격은 상당히 위력적이었다. 공중에서 “쾅!”, 하고 터져서 떨어지면 파편이 우루루 쏟아지고, 또 사격에 맞아서 튀는 그런 형태였다. 인민군은 고지에 미군이 포를 쏜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금세 포를 팠던 것이다.
우리는 소총으로 사격해봤자 사거리도 안 되고 고지에서 한참동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 얼마 후 연대장의 명령이 떨어졌다. 앞에 야트막한 절벽이 붙어 있었고 우리가 그 위에 있었는데 그 벽면으로 돌격해서 내려가라는 것이었다. 적의 고지로 돌격해 들어가기 위해 인민군의 공격에 맞서며 내려가야 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돌격 앞으로!” 뛰어나가니 죽은 듯이 호에 엎드려 있던 인민군들이 막 쏟아져 나왔다. 치열했다. 나는 그때 어떤 연유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소총이 아닌 권총을 차고 있었다. 피스에 묶은 권총을 빼들고서 적진을 뚫고 내려왔다. 내가 앞으로 가야 장병들이 따라오니 “앞으로! 앞으로!” 하면서 정신없이 뛰어 내려왔다.
밀폐된 장소를 찾기 위해서 마구 뛰어내려왔는데 어느 순간 보니 권총이 보이지 않았다. 살펴보니 땅바닥에 질질 끌려오고 있었다. 권총을 허리춤의 띠에 붙들어 매어 놨는데 어느 순간 권총을 놓쳐서 땅바닥에 질질 끌려온 것이다. “돌격 앞으로!”하며 단숨에 100여ｍ를 내리꽂은 것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총이 어디 있는지 모를 정도로 치열했던 것이다.
고지를 내려온 우리는 이제 인민군 보병이 잠복한 고지를 향해 돌파하기 시작했다. 그때 18연대의 몇 중대하고 같이 섞여서 내려갔는데 양쪽에서 협공해 올라가는 것이었다. 우리가 내려왔을 때 포탄 터뜨리는 공격은 멈추었고 이제 5중대가 철수했던 옆으로 접근해 돌진해 들어갔다. 이때 사격을 하는 나의 총 가늠자에 적탄이 날아와 튀었다. 총탄이 가늠자를 맞지 않았다면 내 얼굴에 정통으로 박혔을 것이다. 천운으로 목숨을 건졌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위기를 넘기고 우리는 단숨에 고지로 돌파했다. 그리고 호 속에 부상당해 숨어 있는 인민군 몇과 작대기같이 생긴 기관포로 사격하는 인민포병도 사로잡았다. 물론 아군의 인명피해도 있었지만 우리는 이때 따발총 몇 자루와 기관포, 그리고 대 여섯의 포로를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다.
그런데 소령 계급인 18연대 대대장이 나타나서 포로와 노획품을 내놓으라고 했다. 그는 “잡기는 너희가 잡았지만 우리가 지원해서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며 전과물을 다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주장에 동의하기 어려웠지만 전과물 가지고 싸우고 싶지 않았다.
“가져가려면 가져가십시오. 단 보고는 공병대에서 받았다고 해주십시오. 우리는 연대장님한테 그렇게 보고를 하겠습니다.”
그는 아무 소리 없이 포로와 노획품을 인계받아가지고 갔다.
그렇게 은행리 전투가 승전으로 끝났는데 그때 또 하나 잊히지 않는 일화도 생각난다. 그때 거기까지 민간인인 아주머니와 지게꾼들이 주먹밥을 날라가지고 왔는데 한국군과 인민군이 싸우는 그 사이를 뚫고 들어왔다. 그래서 우리가 “총알이 날아다니는데 어딜 오느냐! 엎드려라!”고 소리소리 질렀다. 그들은 공포에 질려 어정쩡하게 멈추어 서서 갈팡질팡 했다. 민간인이라서 조준해 쏘지 않아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다행히 총알은 그들을 비켜갔다.
그때 주먹밥은 어떤 땐 새우젓이 붙어 있기도 했고, 어떤 때는 소금이 붙어 있었는데 없어서 못 먹을 정도로 맛이 있었다.
마을이름처럼 은행리에는 당시 큰 은행나무가 있었다. 치열한 격전을 치루었고 전과도 올린 지역이라 휴전 후 은행리를 꼭 가보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다. 언젠가 그곳 출신을 우연히 만난 적이 있어서 물었더니 은행나무가 지금도 있다고 했다. 지금은 가보고 싶어도 거동이 불편해서 여의치가 않으니 참 아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