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상황인데 앞에 있는 연대들이 밤에 인민군의 습격을 받았다. 인민군 보병부대가 피난민 속에 있다가 스멀스멀 나와서 뭉쳐가지고 기습공격을 해온 것이다. 우리 공병대는 작전참모한데 불려가 채 명령도 못 받고 습격을 받았다.
어디다 대고 총을 쏴야 하는지 갈피를 못 잡고 있는데, 미군 전차 하나가 하늘에 대고 기관포를 쏘아댔다. 피난민들이 뺑 돌아가면서 노숙하고 있으니 하늘에 대고 쏠 수밖에 없는 기가 막힌 일이었다. 미군전차 뿐만 아니라 전차 밑에 숨어 있는 미군 경비병도 하늘에 대고 사격을 했다. 한국군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우리는 습격을 감당할 수가 없어 급히 철수했다. 사단장 이하, 지휘부들이 어디로 갔는지 모를 정도도 급박한 철수였다. 산더미처럼 밀려오는 피난민을 막을 수가 없어서 허용한 것인데, 그것이 인민군한데 게릴라전술을 허용한 치명상이 된 것이다.
포항이 인민군의 수중에 떨어지고 아군은 안강 포항 전선에서 밀려 후퇴했다.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울진이나 울산 쪽 후방으로 퇴각하는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최후의 낙동강 마지노선이 그때 울산 쪽에 있었다.
이제 거의 끝까지 왔다. 계속 남으로 밀려오면서 나는 “스물하나, 둘, 이 청춘의 나이에 인생을 제대로 꽃도 못 펴보고 죽는구나,”라는 생각을 숱하게 했다. 그러나 나는 많은 전우들의 죽음 속에서 용케 살아남았다. 적에게 밀려 남하하면서 “여기가 마지막인가?” 하다가 운 좋게 목숨이 유지되면서 희망이 생기고, 또 “여기가 마지막인가?”하다가 다시 역전의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총알 하나를 남겨 두고서 만약 잘못되어 포로가 되면 자결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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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낙동강 전투에서 부상당한 국군을 업어 이송시키고 있는 미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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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러 번의 생사의 갈림 길에서 용케 위기를 넘기고, 전쟁이 진행될수록 자신감을 갖고 전쟁에 임했다. 작업복 바지 주머니에는 교본을 넣었다. 전술전략을 참고하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총탄을 막는 방어차원이기도 했다. 역시 윗도리 가슴 주머니에는 콘사이스를 넣었다. 교본을 보려면 콘사이스가 필요하기도 했고 방어차원이기도 했다.
야전에서 철모를 벗고 누울 때 적이 이쪽에서 올 거냐, 저쪽에서 올 거냐를 판단하고 오는 쪽이라고 생각되는 쪽에 철모를 놓고 잤다. 유사시에 머리에 총탄을 피하기 위해서 행하는 방식이었다.
당시 소대장과 중대장은 소모품이라는 말이 있었다. 인민군 저격병이 소대장, 중대장을 노리고 있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엎드려 쏴’ 하고 있다가 일어날 때는 데굴데굴 몇 바퀴 돌아서 일어나는 기본 철칙을 철저히 지켰다. 실제 바로 일어나다가 당하는 것을 옆에서 많이 목격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위기를 넘기고 살아남으니 신념이 생기고 나중에는 대담해지기도 했다.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피아는 8월 말부터 9월 20일경까지 치열한 격전을 치르며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9월 15일 맥아더 원수가 이끄는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을 거두며 아군은 북진의 계기를 맞았다. 마침내 인민군 제5사단과 제12사단의 낙동강전선 돌파를 격퇴시킴으로써 동부전선에서도 반격의 실마리를 찾았다.경 주까지 밀린 국군이 낙동강 전선을 회복하며 북진(北進)의 단초를 마련한 것이다.
이제 북진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경주에서 청송(靑松), 단양(丹陽), 영월(寧越)을 거쳐 평창(平昌)으로 진군했다. 평창에서 하진부(下陣富)쪽으로 해서 구룡령(九龍領)을 넘고 양양(襄陽)을 거쳐 3·8선을 돌파했다. 3사단과 수도사단이 가장 먼저 3·8선을 넘은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