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단 우리 3과가 주둔하는 민가 방을 하나 마련해주고 세 처녀가 숙박을 하도록 해주었다. 그렇게 세 처녀는 서호진에서 부대와 함께 일주일동안 머물렀다. 선임하사도 전에 묵었던 집의 딸인데다, 상관인 내가 각별히 신경을 쓴다는 것을 알고 세 처녀를 각별히 챙겨주었다.
열차에 태워 보낸 후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그렇게 해서 나는 아내가 될 여자를 또 만나게 되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세 처녀야 말로 진퇴양난에 빠진 거나 진배없었다. 운명이었는지 몰라도 나는 그때 세 처녀를 끝까지 책임져주어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게 있었다. 아니, 이미 자매 중의 언니인 최기복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북진할 때 우리는 농반진반으로 “함흥, 회령에 가면 이북 미인들이 굉장히 많다더라. 거기 가면 괜찮은 처녀를 잡아서 마누라를 삼아야겠다.”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실제 만난 것이다. 그때 최기복이 마음에 들었던 것은 물론 인상도 호감이 갔지만 이북의 처녀들이 좀 건방진 데가 있었는데 참 겸손했다는 것이다.
중공군이 시시각각 남하해 오고 있었다. 공병대는 최후에 철수를 해야 한다. 따라서 그 전에 세 처녀를 피난시켜야 했다.
그때 연락병인 김재규라는 일등병이 있었는데, 그의 고향이 김해였다. 내가 고민을 하자 그는 “저희 집으로 피난 보내면 어떻겠습니까? 제가 편지를 써 보내면 얼마동안 피난살이를 할 수 있을 겁니다.”라고 제안을 했다. 나는 그 집 사정도 모르고 가본적도 없었지만 부산 쪽에 일가친척도 없고 다른 마땅한 방법이 없었으므로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
나도 부탁한다는 편지를 쓰고, 연락병도 자초지종을 담은 편지를 부모 앞으로 써서 자매 중의 언니에게 주었다. 그리고 “가면 잘 해줄 테니 걱정 말고 가시오.”라고 안심을 시켰다.
그때 3사단 후방부대가 오면서 징발한 민간 똑딱선이 있었다. 그 배가 부산까지 간다고 해서 나는 선장한테 돈을 좀 주어서 세 처녀를 태워달라고 부탁했다. 원래는 병력을 이동시키는 LST에 남장을 시켜 태워 보내려 했지만 쫓겨나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당시 3사단이 징발한 똑딱선도 겨우 끄트머리 몇 자리만 남은 상태였다. 중공군은 지척에 오고 하루밖에 시간이 없었다. 그 배에 태우지 못하면 사실상 피난을 포기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신병(身柄)을 보장할 수 없는 상태를 맞는 것이다.
그때가 12월 달이니 6개월 여 동안 받은 월급을 나는 그대로 주머니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때 돈으로 한 달에 육군 중위 월급은 한 1000원 정도였던 것 같은데, 아마 6천원인가 그랬다. 나는 그 돈을 전부 봉투에 넣어서 최기복에게 주었다. 그녀는 내가 준 봉투가 뭔지도 모르고 받아 품에 넣었다. 그러니 나중에 돈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때 소 한 마리가 천원이었을 정도로 이북에서는 이남 돈은 비쌌다.
그때 또 우리 과에서 하사관들이 구운 빵이 있었다. 나는 그 빵을 한 아름 싸서 처녀들에게 “배안에서 며칠이 걸릴지 모르니 먹어라”며 건네주었다. 세 처녀가 부산으로 가 있는 동안 생활비도 있어야 하고 또 배를 타고 가는 동안 끼니도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부산에 가거든 김해로 찾아가시오. 걱정하지 말아요. 거기서 잘 돌봐 줄 겁니다!”
나는 최기복을 그렇게 위로해서 배에 태웠다. 걱정 어린 표정이 역력했지만 그녀는 내가 시키는 대로 선뜻 응했다. 물론 다른 방도가 없었기도 했겠지만, 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때 마음속으로만 호감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지 서로 어떠한 애정표현이나, 언약은 없었다. 그러니 우리는 사실상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다. 솔직히 배를 태워 보낸 후 다시 만난다는 보장도 없었고 사실상 나는 그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월급 탄 것을 10원 한 장 안 남기고 최기복에게 다 준 것도 항상 ‘지금이 이 세상의 끝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설적으로 나는 그때 최기복에게 모든 걸 걸었고 다 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