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처녀가 떠난 후, 우리는 서호진에서 한 열흘 작전을 수행했다. 그 유명한 흥남철수작전이었다. 공병대가 마지막까지 남아 열차 등 적이 들어와 쓸 수 있는 모든 시설물들을 폭파하거나 폭파장치를 하고, 또 철수하는 미 10군단을 엄호하는 임무까지 수행했다. 그러니까 모든 철수를 마무리하고 나도 떠나는 것이다.
“여기서 어떻게 살아남아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
최후 철수부대인 만큼 우리는 극도의 긴장감과 급박함 속에서 작전임무에 전력을 다했다. 물론 그 이전의 청진을 떠나올 때도, 성진을 떠나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최후로 남아 공병대의 마지막 임무를 수행했다. 함흥, 흥남, 서호진 일대의 시설물을 다 폭파했다. 말하자면 적군이 먹고 자고 할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심지어는 우물의 두레박과 방 문고리에까지 당기면 터지도록 폭발물을 설치했다.
그때 중공군은 무장을 적게 하고, 적의 무기와 적의 식량과, 적의 시설을 가지고 전쟁을 수행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몸만 가지고 다니는 것이 중공군전술전략의 하나였다.
12월 23일, 우리는 마지막으로 흥남을 출발했다. 우리 수도사단 공병대가 흥남에서 군함을 타고 상륙한 곳은 지금의 동해(東海)시인 묵호항이었다. LST가 닿을 만한 항만시설을 갖추고 있어서 묵호에 접안을 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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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년 12월 흥남철수작전 당시 흥남부두에 모인 군인들과 피난민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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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우리 공병대는 양양으로 진격해 간성, 고성, 설악산 등지를 오르락내리락 하며 중공군과 대치했다. 전쟁은 3·8선을 사이에 두고 새로운 양상으로 접어들었고 우리는 동해안을 타고 일진일퇴의 격전을 치르게 되었다.
서부전선이 무너져 아군이 수원 쪽으로 퇴각하고, 동부전선도 양양 선에서 강릉 선으로 퇴각했다. 그러다가 서부전선이 수원에서 오산으로, 동부전선은 강릉에서 삼척으로 퇴각을 했다. 서부전선이 무너지며 동부전선의 수도사단도 유엔군과 함께 삼척(三陟)으로 후퇴한 것이다. 1951년 1월 아군은 오산-제천-삼척을 연결하는 라인캔서스로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하고 1월 25일 대반격을 개시하여 서부전선에서 수도 서울을 다시 탈환했다.
공병대는 라인캔서스에서 장애물을 설치하겠다는 작전계획을 상급부대에서 받아서 하급부대에 나눠주고 그런 역할도 수행해야 한다.
지뢰를 설치하고 그대로 방치하면 아무 힘이 없다. 적이 와서 캐버리면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 일을 막기 위해서 보호하는 장비가 있어야 한다. 기관총을 어떻게 배치하고, 또 폭파장치를 어떻게 하고, 어떤 때는 폭파하고, 어떤 때는 연쇄 폭발하도록 하는 등등의 공병작전에는 여러 매뉴얼이 있다. 후퇴할 때 삼척까지 군단공병이 관장을 했지만 그 후로는 사단공병이 인수하기로 되어 있어서 내가 군단공병을 인수받으러 다녔다. 그 때문에 지프차를 타고 왔다 갔다 하며 폭파지점을 다시 감찰하고, 인수받고, 부대배치를 하면서 흥남철수 두어 달이 넘었을 때였다.
이때 나는 최기복과 기적 같은 조우를 했다. 그것도 전방일선의 길에서 우연히 만난 것이다. 당시 도로는 폭이 3ｍ정도 밖에 안 되었다. 따라서 트럭이 반대방향에서 오면 지프차가 비켜주는 것이 정도였다. 비켜주지 않으면 통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삼척에서 임무수행 차 지프차를 타고 가는데 반대편에서 병력을 싣고 오는 트럭이 달려오고 있었다. 운전병이 지프차를 세우고 비켜주었다. 짐을 잔뜩 싣고 있는 군단 트럭이었다. 우리가 비켜주면서 가라고 손짓을 하니 트럭이 지나갔다. 그런데 지나가는 트럭 화물칸을 보니 한 귀퉁이에 하얀 저고리에 까만 치마를 입은 처녀 셋이 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의아스러워서 자세히 보니 최기복을 위시한 예의 세 처녀들이 아닌가?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런데 분명히 세 처녀다. 소리를 질러 트럭을 세웠다. 나는 지프차에서 뛰어내려 “어떻게 된 거냐.”고 소리치며 “내리라”고 했다. 세 처녀들도 나를 보고 놀랐는지 대답도 제대로 못했다. 나는 아는 처녀들이라고 해서 트럭은 보냈다.
세 처녀를 남으로 보낸 후 당시로서는 전혀 소식을 알아 볼 수단이 없었으므로 나는 막연히 연락병의 김해 집으로 가서 잘 지내고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삼척의 일선에서 조우(遭遇)하게 된 것이다. 자초지종을 떠나 일단 반가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