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월남군도 유학을 와 있어서 우리는 쉬는 시간에는 그들과 같이 어울리기도 했고, 워싱턴 DC에 가서 아이젠하워 대통령 취임식을 구경했던 기억도 난다. 엄숙하면서도 자유로운 취임식은 그야말로 대축제였다.
크리스마스 홀리데이 때는 일주일여 휴가를 맞아 미8군의 인사부장을 했던 대령 집에 초대되어 저녁식사를 하기도 했다. 또 이때 이종찬[李鐘贊, 1916 ~ 1983], 장도영[張都暎, 1923 ~ 2012] 장군이 방미해 우리들을 격려하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도 있었다. 크리스마스 동기(冬期)휴가 기간이라 뉴욕으로 구경을 간 장교도 있었지만 나는 영관장교 몇과 함께 학교에 남아 있었는데 두 분이 미 공병학교로 찾아왔다.
초급장교 몇이 뛰어와서 “장도영, 이종찬 장군이 오셨답니다. 가보십시오.”해서 갔더니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는데 장도영 장군이 정부를 맹비난 했던 기억이 난다. 사실 그때 미국에는 한국 고위층자녀들이 많이 도피해와 있었다. 장도영 장군은 이 점에 대해 굉장히 비분강개했다.
“정부가 썩어 빠졌다, 바로 잡아야 한다. 이대로 놔두어서는 일선장병들의 사기에 악영향을 끼친다. 이래서는 국가가 제대로 발전할 수 없다." 이런 요지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때부터 야심을 갖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반해 이종찬 장군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때 미국 가서 보니 한국의 고관대작의 자식들은 다 거기 와 있었다. 장택상 씨의 딸, 장면 씨의 딸도 미국에 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 초대 주미대사인 양유찬[梁裕燦, 1897. - 1975.] 대사의 집에 초대를 받아서 간적이 있었는데, 부인이 한국인이 아닌 것 같았다. 그때 우리는 “한국의 대사 가정이 저 모양이다”라며 갔다 와서 불쾌한 감정을 피력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심히 넘길 수도 있는 문제지만 숱한 죽음을 넘기며 전쟁터에서 온 우리로서는 미국의 동포들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갖기 어려웠다. 유학 전 대구의 육군본부에 있을 때 대구시내의 헌책방에서 일본의 군사, 정치 서적을 많이 구해 읽었다. 그런 까닭에 국가와 사회의 현상들에 대해서도 깊은 생각을 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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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 군사유학 시절 / 서 있는 동료 중 가운데가 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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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고국은 아직 전쟁 중이었다. 국가유학이라고 하나 미국에 와 있는 것에 대해 전우들한테 말할 수 없는 미안한 마음과 미국의 동포들한테는 분노의 마음이 혼재했다.
1952년 3월. 우리는 미국 유학을 마치고 샌프란시스코, 하와이, 도쿄를 거쳐 귀국했다.
아내가 생후 40일된 아들을 안고 대구역에 마중을 나와 있었다. 지금도 잊어버리지 않는데 아내가 안은 포대기 속에 아주 조그만 게 있었다. 미국에서 이미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은 들어서 상상을 하고 왔지만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감격이었다.
나 없는 동안 아내가 고생을 많이 했다. 아내는 임산부의 몸으로 대구(大邱) 동천 비행장 근처의 과수원에서 과일을 떼어다가 시장에 나가 팔았다고 한다. 그렇잖아도 출국 전 교사로 취업한다는 것을 내가 “여자는 집에 있어야 한다. 내 아내를 직업전선에 내 보낼 수 없다.”며 말렸었는데, 내가 미국에 가 있는 동안 젖먹이를 데리고 장사를 하며 가계(家計)를 꾸린 것이었다. 내가 있을 때보다 오히려 살림이 나을 정도였다. 함경도 기질 탓인지 아내가 억척스런 면이 있는데, 내가 마음 놓고 군인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아내 덕분이었다.
유학생들은 귀국 후 일단 육군 공병학교에 배치되어 미국에서 공부한 것을 토대로 한국군의 공병 교재를 검토하는 작업을 했다. 우리는 스터디를 해서 수정 보완 차트를 만들어 일선부대로 보내고 설명회도 가졌다. 실제와 현장성을 가미해 평가결과를 취합하는 작업이었다, 옳다는 결과가 나오면 채택을 해서 교재로 확정했다. 그 교재에 의해 정기 한국군 교육을 받게 해서 교리를 체득하게 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한국군 현대화의 일환인 셈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