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관의 리더십에 대한 고민과 ...

다음 날 나는 통조림을 그대로 차에 싣고 보급과로 갔다. “창고에 들어가 보자”고 해서 직접 특식보급 수량을 확인했다. 조사를 해보니 상당한 수량이 비었다. 추궁을 하니 대대장한테 한 박스, 중대장한테 한 박스, 소대장한테 한 박스, 선임하사한테 한 박스, 이런 식으로 보냈다는 것이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사병들의 특식이 간부들의 특식으로 변질되었던 것이다.

나는 그날 저녁 비상소집을 걸었다. 간부들 집으로 보내진 통조림을 다 가지고 들어오도록 조치를 내려 전량 다 회수했다. 하여튼 그런 소동을 거치며 나는 부정한 일을 일절 배제하고 내 깜냥에는 지휘관으로서 사병들 급식을 제대로 공급한다고 자부했다.

그렇게 자위를 하던 어느 날 나는 내무반을 순시하게 되었다. 보급과에 갔는데 장병들이 식사하러 가고 내무반이 비어 있었다. 그런데 노트가 하나 눈에 띄어 펼쳐보았다. 말하자면 선임하사관이 써 놓은 일지 같은 것이었는데 통조림 회수사건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거기에는 놀랍게도 ‘…새로 온 대대장님이 비상을 걸어 통조림을 회수해 사병들이 먹게 한 것은 좋지만 그 일로 인해서 온 부대가 소동이 벌어져 장병들이 잠을 못자고 고생한 것은 대대장님은 모를 것이다. 대대장님은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보급과장을 불러서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조용히 해결했더라면 많은 간부들이 마음의 부담이 덜 했을 거고 그러면 장병들도 피곤한 일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니까 중대장, 소대장 이런 간부들이 받은 충격과 조치에 대한 마음의 부담, 이런 것을 전혀 생각지 않은 대대장의 독선이라는 것이었다. 복합적으로 여러 가지를 세심히 살피는 융통성 있는 조치가 아쉽다는 내용인 것이다. 통조림사건의 조치로 대대장이 사병들의 후생복지에 애 쓴다는 평가가 아니라 오히려 비판적이었던 것이다. 나는 일지를 읽으며 ‘내가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다.’는 자괴감이 들었고 지휘자로서 다시 한 번 성찰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또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군수기지창 창고를 민간건설업자가 수주를 맡아 지었다. 완공이 된 후 어느 날 공사를 맡았던 건설업자가 집으로 찾아와 봉투 하나를 내 놓았다.

“이게 무엇이지요?‘
“대대장님의 배려로 공사가 무사히 끝나고 돈 좀 벌었습니다. 여러 가지로 도와주신 감사의 표시입니다.”

일종의 촌지였다. 나는 성의는 고맙지만 그 돈을 받는 것은 온당치 않다며 도로 밀어냈다. 그 또한 완강히 봉투를 내 쪽으로 밀었다. 그렇다고 화를 낼 수도 없어서 나는 실랑이 끝에 “정 그렇다면 좋습니다. 부대 전체가 모인 자리에서 주십시오. 내 개인한테 주는 게 아니고 부대한테 주는 거 아닙니까?”라고 말했다.

▲ 백선엽 사령관으로부터 사령부공사 공로표창장을 받고 있는 필자

결국 그 건설업자는 돌아갔다가 다음날 아침 부대로 왔다. 나는 각 중대장, 과장들이 모인 자리에서 봉투를 내놓게 했다. 당시로서는 거금인 10만원이었다. 나는 그 돈으로 분대별로 돼지 한 마리씩을 주어 장병들이 고기와 술을 실컷 먹게 하고 또 영외 거주하는 대대장교들과 간부 하사관들한테는 가족 동반 저녁파티를 열어 주었다.

촌지를 안 받기보다는 간부들이 있는 자리에서 기부형식으로 내놓게 해 부대 전체를 위해 쓰게 된 것은 앞서 하사관의 일지내용을 반영시킨 것이었다. 촌지를 받아서 ‘장병들 회식시켜주고 간부들은 저녁 파티를 했으니 서로 좋은 게 아닌가. 하사관의 일지내용처럼 처리한 것 같다.’ 하며 나는 현실적으로 처리했다고 생각했다.

그 후에 도 내무반 순시를 할 기회가 있어 나는 또 일지를 펴 보았다. 만약 썼다면 ‘좋았다’라고 씌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딴판이었다.

‘…대대장님은 결백하게 행동하고 장병들을 회식시켜주어서 만족스러웠을지 모르나 실제 공사를 담당한 간부들은 서운했을 것이다….’

나는 일지를 읽으며 ‘참 고약한 놈이네. 이러면 이렇다고 불만이고 저러면 저렇다고 불만이네.’라고 괘씸한 생각이 들었지만 ‘리더는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생각을 했다. 또 일지를 쓴 하사관의 말이 정답일 수는 없으나, 지휘관이라는 자리가 간단한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실감했다. 한편 일지를 쓴 하사관이 괘씸하기도 했지만 나는 일절 모르는 체 했다.

젊은 장교시절 이런 말이 한참 돌았다. 모 대대장이 부대 내에서 후생사업을 해서 자기는 10원 한 장 안 쓰고 영외 거주하는 장병이나 휴가 가는 장병에게 용돈에 보태 쓰라고 나누어 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대장이 지휘검열에서도 우승을 할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이런 말이 돌면서 젊은 장교들이 토론도 많이 했는데, “지휘관이 제일 치사스런 것은 사병들 먹으라고 나온 쌀이나 특식을 착복하는 것이다. 또 수입이 생기면 차라리 부하들한테 가도록 하는 것은 떳떳하지만 혼자 먹는 지휘관은 몰염치하다.” 이런 말을 많이 했다.

어쨌든 촌지를 돌려주는 것도 좋지만 현실적으로 장병들을 위해서 쓴 다면 그 나름으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나를 만족시키기 위한 위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못된 지휘관들도 많았지만 “나는 정도를 걷는다.” 이런 자부심과 자기만족을 위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는지 통찰해보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