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서울 창신동에서 태어날 무렵 아버지는 보성고보[普成高普/ 지금의 보성고등학교 전신] 학생이었고 어머니가 하숙을 치며 가계를 꾸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열아홉에 형을 낳았고, 스물 하나에 나를 낳았다. 보성고보 4학년 때였다. 그러니까 나와 형은 3년 차다.
아버지가 열두 살, 어머니가 열여덟 살 때 결혼을 했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일로 어머니가 여섯 살 연상이었던 것이다.
사실 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아버지는 어머니 없이 성장을 하게 되었는데 열여덟 살 신부가 열두 살짜리 신랑을 키우다시피 하며 살게 된 것이다. 영화에서나 봄직한 얘기로 실제 나는 어머니가 누룽지를 치마폭에 감추어 서방님(아버지)한테 주었다는 얘기도 들은 적이 있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는 시아버지를 모시고 큰집 살림을 하며 어린 두 시동생들을 자식처럼 키우다시피 했다. 그때는 사내아이들도 머리를 길게 땋았기 때문에 머리를 자주 감지 않으면 서캐가 생겼다. 어머니가 삼촌들을 머리 감기고, 참빗으로 빗어주는 등 궂은일을 도맡아야 했던 것이다.
교육열이 높은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보령에서 공주(公州)에 있는 기독교 계통 사립중학교에 보냈다. 중학을 졸업하게 되자 아버지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서울의 보성고보에 응시해 합격했다. 이때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공부시키기 위해 서울 창신동에 집을 하나 지어 어머니를 보내 하숙을 치게 했다. 그 하숙비로 아버지의 학비를 대고 먹고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백일이 될 무렵 어머니를 제외한 아버지, 나, 두 살 바기 형 등 가족이 장티푸스에 걸렸다. 장질부사라고도 하는 장티푸스는 지금이야 거의 사라진 병이고 별 것 아닌 병이지만 의술이 형편없었던 당시에는 걸리면 열에 두 셋은 죽는다고 할 정도로 무서운 전염병이었다.
생명의 위기 앞에 아버지는 치료를 위해 가족을 이끌고 할아버지가 살고 계신 충남 보령군 웅천면 소황리로 낙향했다.
우리 가족은 고향의 할아버지 집에서 본격적인 치료에 들어갔다. 물론 현대적인 의약을 통한 치료가 아닌 민간요법이었다. 그때 형과 나에게 고열진통제로 아편을 먹였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아편이 만병통치약처럼 되어 있을 때였다. 그런데 과다하게 먹였던 모양이었다. 어느 날 형과 내가 의식을 잃고 말았다.
할아버지는 우리 형제가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큰 삼촌을 시켜 마을 뒷산에 갖다 묻으라고 했다. 그런데 삼촌은 바로 묻지 않고 우리를 포대기에 싸서 뜨거운 아랫목에 놓아두었다. 운명이었을까? 얼마 후 나는 깨어났지만 세 살 바기 형은 끝내 깨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큰 삼촌은 두고두고 “네 목숨은 내가 살린 거다. 네가 살아나서 공부도 하고 잘된 것도 다 내 덕분인 줄 알라.”고 농을 하시며 자랑하시곤 했다.
형의 생명을 앗으며 병마가 지나가자 아버지는 어머니와 한 살 바기 나를 고향에 남겨두고 다시 학업을 잇기 위해 상경했다. 그리하여 나는 유년기를 쭉 보령의 할아버지 집에서 보내게 되었다.
장티푸스가 치료되자 혼자 상경한 아버지는 보성고보를 졸업하고 경찰관 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그 후 수원경찰서에 배속되어 매송면 주재 경찰서에 보직되어 근무를 하게 된다. 그런데 이때 아버지는 서울에서 신교육을 받은 여자를 만나 새장가를 들었다. 내 생각이지만 아버지가 나이가 많은 어머니에게 마음이나 정을 두지 못했던 것 같다. 아버지 입장에서 어머니는 여섯 살이나 연상인데다 애를 둘이나 낳은 시골아낙에 불과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보령서 시아버지를 모시고 나를 키우며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보령으로 내려오신 아버지는 어머니더러 친정집으로 가라고 강요했다. 결국 어머니는 아버지의 등쌀에 못 이겨 보령의 할아버지 집을 떠나야 했다. 사실상 쫓겨난 것이었다. 이때 나는 어머니 등에 업혀 어머니의 친정인 외가로 가게 되었다.
어머니의 친정은 보령군 미산면 성주리라고 하는 곳이었다. 아버지는 남동생 둘만 둔 아들형제만 있었던데 반해 어머니는 전부 자매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섯 딸 중에 어머니가 셋째였다.
어머니가 쫓겨난 정황을 알 턱이 없는 나는 외가의 어머니 품에서 두어 해 보낸 것 같다. 그리고 다섯 살 무렵의 어느 날이었다. 큰 삼촌이 외가로 찾아왔다. 그때 눈깔사탕을 가지고 온 큰 삼촌은 “종성아!” 하며 사탕을 내밀었다. 속도 모르고 나는 좋아라 받아먹으며 하나 더 달라고 했고, 그럴 때마다 삼촌은 하나씩 더 주었다. 그렇게 살살 꾀어 어머니 품에서 삼촌은 나를 빼앗다시피 했다. 이것이 나와 어머니의 이별이었다.
삼촌은 나를 업고 외가를 빠져나와 20여리가 되는 산길을 걸어 대천읍까지 나왔다. 대천에서 웅천까지는 버스를 탔던 것 같다. 웅천에서 또 소황리 할아버지 집까지는 삼촌 등에 업혀 걸어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다섯 살에 어머니 품을 떠나 다시 할아버지 집으로 오게 된 것은 물론 아버지의 뜻이었다. 아마도 사전에 어머니하고 얘기가 되었을 것이다. 내 생각에는 어머니도 이때는 체념하고 합의 하에 이혼도장을 찍어주었던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