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별은 결국 나와 어머니 간의 생이별을 강요했고, 모자(母子)의 인연 단절로 이어진 것이다. 가장 어머니의 품을 필요로 하는 다섯 살 바기…. 나는 감내하기 어려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상처를 싸안고 유년기를 보내야 했다.
내가 소황리로 올 무렵 할아버지는 후처를 얻었다. ‘서 할머니’라고 불렀던 할머니는 일곱 살 먹은 딸을 하나 데리고 왔는데 나하고 두 살 차이였다. 사실 나한테는 고모 격이었는데 만날 나하고 티격태격 싸웠다. 싸우면 내가 더 얻어터지고 “사내가 왜 계집애를 때리느냐.”며 야단은 내가 다 맞았다.
그때 삼촌 두 분이 같이 사셨는데 나보다 큰 삼촌이 열두 살, 작은 삼촌이 여덟 살 위였다. 나는 서 할머니의 보살핌과 여덟 살 위인 작은 삼촌을 많이 의지하고 따랐다. 큰 삼촌은 몇 년 있다가 장가들어 따로 나가 살고 작은 삼촌이 서 할머니 밑에서 나하고 같이 컸다.
작은 삼촌은 폐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삼촌과 나는 폐에 좋다는 메뚜기를 많이 잡으러 다녔는데, 잡아다가 서 할머니한테 주면 볶아서 가루를 내주었다. 삼촌은 폐를 치료하기 위해 메뚜기가루를 많이 마셨는데 당시로서는 그게 유일한 단백질 섭취였다.
당시 할아버지는 소 두 마리를 키웠고 머슴도 둘인가 두고 있었다. 농사는 스무 마지기짜리 두 필지를 지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백 석 정도를 짓는 중농이었다. 그때 우리 마을에서 오백 석을 짓는 집이 하나 있었고, 그 다음으로 삼백 석 집이 있었다. 그 다음 세 번째가 우리 집이었다.
교육열이 남달랐던 할아버지는 중농정도였지만 집에다 훈장을 두고 서당을 차려 운영했다. 나는 다섯 살 때부터 서당에서 본격적인 한학교육을 받았다.
나는 두 삼촌과 함께 공부를 하며 천자문(千字文), 계민집(啓民輯), 동몽선습(童蒙先習), 명심보감(明心寶鑑) 등을 차례차례 떼어 나갔다. 자랑 같아서 쑥스럽지만 어른들이 신동(神童)이라고 할 정도로, 나는 천자문 같은 것을 줄줄이 외웠다. 할아버지 친구들이 "여보게 자네 집에 개천에서 용 나네.“ 이런 소리도 많이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여섯 살 되던 해 할아버지가 설립위원장이 되어 현대식 교육기관인 간이학교(簡易學校)를 세웠다. 참고로 간이학교는 1930년대 설립된 2년제 단기 초등교육기관이다. 개교 당시 한 칸짜리 교실에다 학생은 2, 30명 정도였는데 주로 우리 마을인 소황리와 근방의 아이들이었다. 나도 이때 간이학교로 옮겨 국어, 산수 등의 신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이때 머슴이 업어서 등교를 시켜주었던 기억이 난다.
초등교육을 받으며 소년기를 보내던 일곱 살 되던 해에 나는 아버지와 해후했다. 당시 수원에서 경찰직에 근무하던 아버지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며 생활이 안정되자 아들을 부른 것이었다.
나는 삼촌을 따라 수원으로 가 아버지를 만났다. 나는 그 제서야 아버지라는 존재를 처음 인식했고 부자(父子)라는 관계를 어렴풋이 느꼈다. 이때 계모(繼母)도 처음 보게 되었다.
일곱 살 때부터 나는 또 정들었던 보령의 할아버지 품을 떠나 수원의 아버지에게로 왔다.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어린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수원의 <매송 초등학교>에 재입학했다. 보령의 간이학교에서 곱셈, 덧셈, 뺄셈 등 기초과정을 어느 정도 떼고 왔기 때문에 나는 반에서 1, 2등을 다툴 정도로 성적은 우수한 편이었다.
계모는 당시로서는 신여성이었다. 계모는 내게 모자도 씌우고, 하얀 칼라가 달린 서양식 교복을 입히고 운동화를 신겨 학교를 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