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발언이 끝나자 박대통령은 고개를 끄덕끄덕 하며 “거 일리 있는 말”이라며 정일권[丁一權 1917.-1994.] 총리에게 “총리가 건설부, 상공부, 한전하고 조율을 해서 좋은 방향으로 결정이 나도록 하시오.”라고 지시했다.
그때 장기영 부총리가 브리핑을 마치고 차트 옆에 서서 내 발언이 끝날 때까지 서 있었다. 대통령이 사실 상 내 손을 들어주자 장 부총리의 얼굴이 벌개졌다. 지휘봉 들고 대통령 앞에서 브리핑 하다가 체면을 구긴 꼴이 된 것이다. 어쨌거나 소양강댐 건설방식은 재검토 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회의가 끝난 후 나는 붉으락푸르락 화가 난 장 부총리에 불려가 “자네 그래도 되는 거야!”라는 질책을 받았다. 차관의 브레이크로 경제기획원 안이 보류되니 장기영 부총리 입장에서는 기가 막혔을 것이다.
건설부 내 집무실로 들어가자마자 김형욱 중앙정보부장한테 득달같이 전화가 와서 “야 이놈의 새끼야. 그럴 수가 있느냐!” 대거리를 해댔다.
중앙정보부까지 개입해서 이렇게 얼키고 설켜 문제가 복잡하다보니 정일권 총리 또한 이 문제를 껄끄러워 했다. 나와 대척점에 서있던 한전사장은 혁명주체였고, 상공장관 또한 장기영 후임으로 부총리가 된 박충훈[朴忠勳, 1919. ~ 2001.]씨로 권력핵심이었기 때문에 눈치를 보고 있었다.
건설부 장관 또한 껄끄럽다보니 이 문제에 관한 한 회의에 나를 보냈다. 총리주재 관계 장관회의에서 한전사장은 마르베니아와의 약속을 깨면 5백만 달러의 클레임이 생긴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나 나도 물러서지 않았다.
“클레임이라니, 아직 약정도 안 했는데 무슨 소립니까!”
“최 차관이 뭘 안다고 그래요! 일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인 줄 아시오!”
박충훈 상공장관이 타이르듯 말했다. 내가 반론을 제기하면서 여러 차례 입씨름이 오갔다. 이러다보니 정일권 총리는 두 번이나 회의를 주재하면서도 설왕설래하며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다가 태국 왕 취임 참석차 출국했다.
|
|
| ▲ 1966년 건설부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에게 브리핑을 하는 필자 |
|
‘관계부처가 모두 기획원 안을 찬성하는 입장에서 정 총리가 귀국 후에는 결국 경제기획원 안으로 결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든 나는 건설부 안으로 결정짓기 위해서는 그 전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통령 면담이 필수였다.
그때 청와대 경제수석이 김학렬[金鶴烈, 1923. - 1972.] 씨였다. 나는 김 수석을 찾아가 총리 부재를 핑계로 “대통령께 단독 브리핑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선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때 김학렬 수석은 “젊은 사람이 바른 생각을 갖고 있다.”며 나를 지지해주는 입장이었다. 김 수석은 나의 대통령 면담요청을 쾌히 승낙했다.
며칠 후 김 수석으로부터 날짜를 잡았다는 연락이 왔다. 대통령과 만나러 가기 전 나는 치밀하게 자료를 준비했다. 이윽고 약속한 날짜에 나는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독대를 했다.
나는 소양강에 다목적댐을 건설해야 할 논리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여러 가지 자료를 제시하며 설명을 끝내자 박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끄덕 하며 “최 차관 말이 옳아!”라며 비서실장을 불렀다. 이후락[李厚洛, 1924. ~ 2009.] 실장이 들어오자 박 대통령은 “소양강댐은 건설부 주관 하에서 다목적댐으로 건설하는 것으로 경제기획원 이하 관계부처에 대통령 공문을 만들어 보내시오." 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때 초등학교에 다니던 박지만 군이 “학교에 다녀왔습니다.”하고 들어와 인사를 했는데 박 대통령 기분이 굉장히 좋았던 모습이 뇌리에 선연하다.
우여곡절(迂餘曲折) 끝에 건설부 원안대로 결정이 나니 내 마음은 뿌듯했다. 그런데 대통령과 독대를 끝내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한편으로는 큰 일이 났다는 생각도 들었다. 총리와 부총리 입장에서는 자기들을 제쳐놓고 대통령 독대로 문제를 해결했으니 기분 좋을 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권력의 속성상 내가 무사할 수 있을까, 라는 걱정도 들었다. 나는 방을 나오다가 대통령한테 “총리께서 귀국하신 다음에 시달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이 빙긋이 웃으시며 “그렇게 하지.”라고 답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