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기…. 나에게 있어 아버지는 감당하기 어려운 굴레였다. 아버지는 굉장히 엄격했을 뿐만 아니라 아들을 강한 사내대장부로 키우고자 했다. 하여 아버지는 아들의 조그만 흐트러짐 하나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철저히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간섭하고 관리했다. 친구들과 노는 일도 아버지한테 신고를 해야 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나중에 내가 한 말이 맞는지 반드시 확인하셨다. 만약 내 말이 조금이라도 틀리거나 정도(正道)에 벗어났다 하면 아버지는 사정없이 종아리를 때리는 등의 엄벌을 가하셨다.
아버지는 흔히 아이들이 즐기는 딱치치기나 구슬치기 같은 놀이를 하는 것도 못마땅해 하셨다. 공차기나 씨름 등을 권장하셨고 또 씨름을 하면 반드시 이겨야했다. 그것은 사나이다운 승부근성으로 나를 키우려 했던 아버지의 양육방식이었다.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나는 군대놀이 같은 것을 좋아했다. 그때 계모가 만화책을 많이 사다보았다. 대개 만화는 일본의 군대이야기였는데, 훈련받고 전쟁터에 나가서 승리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스토리를 본 따 도화지를 사서 계급장을 만들었다. 대장, 대령, 대위, 장교들이 있고 그 밑에는 하사관이 있는데 대장 계급장은 내가 달고 그 이하 계급은 다른 아이들에게 달게 했다. 그리고는 막대기 하나씩 들고 “받들어 총!” “뒤로 돌아가!” 하는 구령을 하며 군대놀이를 했다. 나는 아이들과 숨바꼭질을 할 때도 모자를 바꿔 쓴다든가, 옷을 바꿔 입는다든가 해서 기발하게 둔갑을 해 아이들을 속이는데 능한 편이었다. 실제 동네에서, 학교에서 싸움도 많이 했다. 설령 얻어터지더라도 절대 항복을 하지 않아서 독종이라고 불렸다.
아버지는 교육 또한 철저했다. 일요일 오후면 도화지와 크레파스를 들고 나를 데리고 인근 들녘에 나가 스케치와 사생을 가르치셨다. 이런 아버지의 양육과 교육방식은 어린 나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굴레임에 분명했고 어떤 식으로든 훗날의 나의 삶과 운명으로 작용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2학년 되던 해 나는 다시 아버지 곁을 떠나 할아버지 집으로 갔다. 아버지가 계모와의 불화로 헤어진데다 마침 할아버지가 보령을 떠나 경기도 화성(華城)으로 이사를 왔기 때문이었다.
당시 전국적으로 시골에 문둥병이 창궐했다. 문둥이들이 애들을 잡아서 부랄을 발라먹으면 병이 낫는다는 소문이 돌기 때문에 당시 아이들이 함부로 산이나 들에 진달래 따 먹으로도 못 갔다. 사실 옛날에는 문둥병이 가장 무서운 병이었다. 할머니도 문둥병에 걸려 일찍 돌아가시고 둘째, 셋째 할아버지도 그 때문이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서울근방인 화성으로 이사를 한 것은 물론 아버지의 권유 때문이었지만 보령에 전염병이 도는데다 자손들의 교육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사실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많이 가르치려했던 것은 또 하나의 숨은 이유가 있다. 할아버지가 둘째였는데 형(큰할아버지)과 불화가 있었다고 한다. 큰할아버지는 몇백석이나 물려받아 떵떵거리고 살았지만 할아버지는 백석 정도니까 설움이 많았던 모양이다. 아버지 말에 의하면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많이 가르치려 했던 것은 집안을 일으키겠다는 의지가 깔려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큰집(큰할아버지)한테의 불만이 우리 아버지대만 해도 있었다. 그런데 큰집이 대도 끊기고 다 망했다.
화성 숙곡리에 할아버지가 이사와 새로 지은 집이 있었다. 아홉 살 때 다시 할아버지 집으로 온 나는 열한 살까지 서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컸다. 이때도 나는 아직 장가를 들지 않았던 작은 삼촌을 많이 의지했다.
4학년을 맞던 해 일제(日帝)의 내선일체(內鮮一體) 제도로 조선어가 사라졌던 아픈 기억도 있지만, 이때는 꿈을 키우던 추억으로 떠오르기도 한다. 서 할머니가 목화실을 뽑아가지고 옷을 만들어주셨고 겨울이면 시커멓게, 여름이면 하얗게 물을 들여 주셨다. 신발은 별로 신지 않고 겨울 외에는 거의 맨발로 다녔다. 등교할 때도 신발을 옆구리에 차고 가서 교문에서 신고 들어갔다.
그때 제사를 참 많이 지냈다. 그러다보니 콩나물 기르고 두부도 일일이 갈아 만들어 먹었던 정겨운 풍경도 떠오른다. 화성군 매송면 숙곡리 할아버지 집에서 살던 시절…. 그 시절은 내 소년기의 아스라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