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과 문학에 심취 (5회)

그러나 아버지를 대신해 할아버지, 어머니를 대신해 서 할머니의 보살핌이 있었지만 어린 나의 마음 한구석은 항상 공허했다. 할아버지와 서 할머니가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워 줄 수는 없는 것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나의 그리움은 날로 깊어갔다. 공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때 나는 아버지로부터 배운 그림 그리기에 취미를 붙였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나의 그림 그리는 취미를 못마땅해 하셨다. 당시는 ‘환쟁이’라며 그림 그리는 것을 천하게 여길 때였다. 할아버지는 “이놈, 환쟁이가 되려고 그러느냐!”며 혼을 내시다가 나중에는 아예 크레용, 도화지 등을 모조리 빼앗아 없애 버리셨다.

그러나 나의 그림그리기 애착은 워낙 강했다. 나는 크레용 대신 연필로, 혹은 막대기로 땅에 그림을 그렸다. 그것을 본 서 할머니가 또 할아버지한테 일러서 작대기로 맞기도 했지만 나 또한 쉽게 고집을 꺾지 못했다.

제법 그림에 소질도 있었던지 초등학교 4학년 때 <경성일보(京城日報)>사의 소국민신문(小國民新聞)에서 주최하는 전국미술대회에 나가 1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당시 상금으로 30원을 받았는데 쌀 몇 가마는 족히 되는 거금이었다.

그림뿐만 아니라 나는 이때 널빤지에 조각하는 공작(工作)도 좋아했다. 그것이 나의 공허한 마음을 채우는 것이었는지는 몰라도.

4학년으로 올라갈 무렵 나는 다시 아버지한테 갔다. 아버지가 두 번째 재취를 얻어 새장가를 들고 아들을 부른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수원 <양감 초등학교>로 전학했다. 이때 나는 눈칫밥을 배웠고 너무 어린나이에 세상을 배웠다.

나는 어린 마음에 ‘계모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두 번째 계모를 만난 때가 열두 살 때였는데 그 1년 전에 계모가 아들을 낳았다. 그러니까 나한테는 열 살 아래 동생이 된다. 그 동생을 나는 틈나는 대로 업어주었다. 또 당시 소풍을 원조라고 했는데 그때 받은 용돈 5전을 안 쓰고 동생 장난감을 사다주기도 했다.

▲ 오산 성호초등학교 졸업 사진 / 아래에서 2번째 줄 왼쪽에서 3번째가 나다

나와 열다섯 살 차이밖에 나지 않아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계모는 어린애 다루는 것이 익숙하지 못했다. 당신이 자식을 낳고 키우면서 나한테는 자식으로서 애정표현을 안 했다. 그러니 나는 외로웠다. 할머니도 친할머니가 아니고 아버지는 호랑이 같고 나한테는 의지할 데가 아무도 없었다. 흔히 아홉 살 정도면 아무 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만 알 건 다 아는 나이다. 아홉 살 때부터 나는 연못가를 들여다보며 빠져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할아버지가 가끔 집에 들러 들여다보셨는데 아마도 내가 불안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환경을 극복해야겠다는 의지의 한 방편이었겠지만 나는 어른들로부터 칭찬받을 수 있는 행동을 알고 있었다. 4학년 여름방학 때 아버지가 할아버지 집에 다녀오라고 차비 50전을 준 적이 있다. 당시 우리 집에서 20여 리를 걸어 나가면 발안(發安)에서 수원으로 가는 버스가 있었다.

나는 버스 타는 데까지 한 20리(8㎞)를 걸어 나와 버스를 타고 오목내라는 데서 내렸다. 그곳에서 매송면 오천리로 가는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오천리에서 할아버지가 사시는 숙곡리까지는 또 한 5리(2㎞)가 된다. 버스를 두 번 타면 25전인데, 나는 그 돈을 벌려고 할아버지 집까지 걸었다. 오천리에 가면 주막이 하나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막걸리 대두(大斗) 한 병과 <장수연>이라는 담배를 한 갑 샀다. 그러면 25전이다.

열두 살 소년이 들기에는 좀 버거운 막걸리와 담배를 들고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숙곡리 할아버지 집으로 갔다. 할아버지는 반가워하시면서 내 손에 들린 물건을 의아스럽게 바라보셨다.

“이거요, 할아버지가 술 좋아하시니까 사왔어요!”
”야 이놈아, 할아버지 괜찮은데 뭘 그런 걸 사오냐!“

타박을 하시지만, 할아버지는 기분이 좋으셔서 동네 어른들을 불렀다.

“우리 손주 놈이 여름방학이어서 할애비한테 오는데, 글쎄 버스를 안타고 그 돈을 아껴서 이걸 사왔구먼.”

막걸리 한 사발씩을 권하며 할아버지가 자랑을 하셨다. 동네 어른들은 착하다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고, 나는 어린 마음에 우쭐했다. 그렇게 나는 어른들의 칭찬을 듣기 위해 머리를 쓰는 조숙한 아이이기도 했다. 나는 그때 뭘 해야 어른들한테 칭찬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